[황창희 신부의 살며 배우며 실천하는 사회교리] (25) 가난과 부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가 최고?
행복 판단 기준으로 경제 수준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신분제 철폐로 얻은 인간 평등권이 무색할 만큼 새로운 신분제도가 생겨났다. 바로 경제적 부로 구별되는 신분계급 등장이다. 안타깝게도 돈이 중심인 사회에서는 재산의 유무로 사람 가치를 평가한다. 그래서인지 성공과 돈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는 세상이 됐다. 이익 추구를 위해 타인의 권리나 안전은 뒷전이고, 진리를 탐구해야 할 상아탑 대학은 더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하느님의 자리, 돈의 자리
아버지는 6ㆍ25전쟁 중 남하한 평양 출신 실향민이셨다. 고향을 떠나 정착한 곳에서 아버지는 주류 기득권층이 되기에는 가진 것이 너무 없었다. 지연ㆍ혈연ㆍ학연이 소중하게 여겨지던 사회에서 실향민이 내세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처음부터 가진 것이 없어서일까? 아버지는 항상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근검절약하는 습관에 길들일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성인이 된 지금도 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사는 것에 익숙하지가 않다. 가장 기본적인 것만 지녀도 사제로 살아가는 데 충분하기에 비싼 물건을 사거나 좋은 음식을 먹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이런 내 모습을 아는 신자 몇 분은 “참 소박하게 사는 것 같아요”라고 칭찬을 한다. 사제의 소박함이 덕으로 칭해지는 것을 보며, 우리 사회 안에서 사제라는 신분 역시 부유층의 한 부류로 비친다는 생각에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래 전 TV 녹화를 위해 평화방송에 간 적이 있었다.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가용이 없었다. 그래서 본당 교우 분에게 서울 방송국까지 운전 봉사를 부탁했다. 방송국 주차장에 승용차를 주차하고 녹화를 마치고 왔더니 주차장 관리하시는 분이 주차비를 요구하였다. 그래서 방송 녹화를 위해 방송국에 왔다는 사실을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신부는 주차비 면제지만 신자분이 운전했기에 주차비를 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 같이 자가용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더니 그 직원분은 몹시 당황해 하셨다. “자가용이 없는 신부님도 계시냐?”는 말과 함께 말이다.
지금 사는 신학교는 강화도에 위치한 까닭에 자가용을 마련했지만, 아직도 그때 그 주차장에서 일하셨던 직원분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돈다. 그분의 판단 기준에는 웬만한 신부들은 다 승용차가 있고 그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신학생 시절이나, 유학생 시절에 비하면 지금 나는 엄청나게 많은 것을 소유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소유한 것이 많을수록 내 안에서 하느님의 자리는 점점 더 적어지는 것 같다. 육체적으로 편해지기 시작하니 가난을 멀리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재화는 나눔 실천을 위한 수단
교회에서는 부와 가난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구약성경에서는 재화와 부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보여준다. 성경은 우선 재화와 부를 하느님의 축복으로 본다. 사치나 부유함이 아닌 풍요로움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복으로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적 재화와 경제적인 부는 그 자체로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재화와 부에 대한 부정적 면 역시 나타나는데 문제의 핵심은 그 부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느냐에 관한 것이다.
구약의 여러 예언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기와 고리대금업, 착취를 커다란 불의로 단죄한다(이사 58,3-11; 예레 7,4-7; 호세 4,1-2; 아모 2,6-7; 미카 2,1-2 참조). 성경은 부의 소유 자체가 아니라 그 부를 쌓기 위해 쓴 수단과 방법, 부를 올바른 곳에 사용하지 않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다. 만일 누군가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올바르지 않은 수단과 방법을 사용했다면, 올바르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자신의 재화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소유한 사람 역시 마땅히 비난받을 만하다(「간추린 사회교리」323항 참조).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따르는 조건으로 자신이 소유한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라고 말씀하셨다(마태 19,21 참조).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는 그가 부자여서가 아니라 자신이 소유한 것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눌 줄 모르기 때문이다. 부유한 사람은 하느님보다 자신이 소유한 것에 더 큰 믿음을 지니고 살아가기 쉬우며, 자기 손으로 한 일로부터 힘을 얻고 자신의 힘에만 신뢰를 두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신앙인은 재물에 모든 가치를 두어서는 안 되며,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하느님을 신뢰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가난함의 진정한 도덕적 가치를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모든 가치를 돈으로 평가하는 우리 사회가 소유보다는 나눔이라는 도덕적 가치에 더욱 힘을 쓰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평화신문, 2014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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