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의 교회읽기] 이름 또는 세례명에 관한 이야기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할례를 받으시던 날 이름을 받으셨다. 그리고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님께서 이름 받으신 것을 기념해 왔다(1월 3일 예수 성명 축일). 아들이 태어나면 할례를 베풀고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은 유다인 가정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차였다. 그만큼 사람이 태어나면 이름을 지어 주는 일이 중요했다는 뜻이다.
비단 유다인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름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 또한 집착이라고 할 정도로 더욱 유별나다. 나아가, 가톨릭 신자들은 세례를 받을 때 어려서 얻은 것과는 전혀 다른 이름을 새로 받는데, 한국에서는 태어나서 받은 이름이 아닌 이 새 이름을 ‘본명’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렇다면 ‘이름’이란 무엇인가? “하늘은 녹(祿)이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 세상에 가치 없고 무의미한 존재는 없다는 뜻이다. 이름 없는 풀이 없다면, 당연히 이름 없는 사람 또한 있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름이란 한 존재의 가치나 의의를 뜻한다. 사람이나 사물은 이름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얻게 되고, 의미를 얻게 됨으로써 존재 가치를 지니게 된다.
주변에서 눈에 띄는 풀들을 두고 우리는 ‘민들레’ 또는 ‘개나리’라 부른다. 그런가 하면 길섶의 여느 풀들은 이처럼 구체적인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그냥 잡초라고 부른다. 그냥 풀일 뿐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민들레나 개나리 역시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냥 민들레면 민들레일 뿐, 그것들 하나하나에 따로 붙여지는 이름은 없다. 그 이상의 다른 이름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 우리에게 특정한 의미를 갖게 되면 이름을 얻는다. 집에서 기르는 개나 고양이는 주인들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에 ‘바둑이’라든가 ‘야옹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러나 그 개나 고양이가 집 밖으로 나가면 그저 누군가가 기르는 개나 고양이일 뿐 바둑이나 야옹이가 되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냥 개나 고양이라는 짐승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는 못하는 까닭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경우는 다르다. 누구든 사람에게는 이름이 있고, 누구나 그 이름으로 불리기를 요구한다. 이름을 알 필요가 없거나 모르는 경우에는 그냥 ‘어떤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고유한 이름이 있다. 그만큼 사람은 하나하나가 의미 있는 개체요 존재라는 말이고, 또한 사람에게 이름은 단순한 호칭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라는 말이다. 그러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의 이름을 아주 중요시하고, 부모들은 자기 아이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 주기 위해 고심한다.
예수님 이름대신 부호화한 상징 사용
신앙인에게도 이름은 매우 중요하다. 신앙인인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소중히 여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특별히 중요시한다. 다 알다시피,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인 ‘예수’는 히브리어 ‘요수아’의 그리스어 식 표기다. 그런데 이 이름을 누구나 자유로이 입에 올릴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쓰지 않을 수는 없었기에, 옛날에는 그분의 이름 대신에 부호화한 상징을 사용했다. 이 상징이 물고기다. 그 힘들고 괴롭던 시절에 그리스도인들이 목숨을 걸고 고백하던 신앙의 표현이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구절이었다. 그런데 그리스어로 이 구절을 이루는 단어들의 머리글자를 따서 조합하면 익투스(ΙΧΘΥΣ), 곧 물고기를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이밖에도 교회의 미술과 디자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리스어 단어의 철자에서 앞 세 글자 또는 앞 글자와 끝 글자를 합성하여 사용했다(IHC, IHS, ICXC).
사도 성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그분이 주님이심을 고백한다고 증언했다(필리 2,9-11). 이 증언대로 후대에 가톨릭 신자들은 하느님 또는 예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머리를 숙이곤 했다. 이 관습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대부분 폐기되었지만, 가톨릭 신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 받든다.
그 연장선상에서 ‘예수 성명 축일’에는 한데 모여서 저 옛날 갈릴래아에서 베드로와 동료 사도들이 예수님의 도움으로 잡았던 물고기, 곧 ‘베드로 고기’라고 불리는 틸라피아를 통째로 굽고 ‘익투스’라는 단어를 새긴 밀가루 과자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인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사용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이름을 고르는 데 적지 않은 고심을 했음을 역사는 보여 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으로 우리에게 모범이 되는 성인들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삼아 왔다. 영국에서 가톨릭과 갈라선 성공회에서는 성경의 주제와 관련된 단어들을 이름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우리가 ‘청교도’라고 부르는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녀들을 좋지 않은 영향들로부터 보호해 주고 힘이나 지혜 같은 좋은 것들로 채워 줄 성 싶은 소위 ‘덕스런’ 단어들을 이름으로 사용했다. 이를테면 독일 계열의 이름에서는 ‘평화’ 또는 ‘보호’를 의미하는 ‘-mund’ 또는 ‘-mond’가 좋은 이름으로 선호되었다.
청교도들은 자기들의 이름에 가톨릭교회나 성공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싫었고, 그래서 자녀들에게 이름을 지어 줄 때 성경의 구절들이나 신심이 깃든 경구들 또는 덕성을 나타내는 단어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많이 선택된 것이 솔로몬(‘평화로운’), 에녹(‘서원한’ 또는 ‘하느님께 바친’) 등 성경에서 따온 이름들이었다.
그리고 영국에서 신앙적인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는 ‘불륜을 피하다’(1코린 6,18 참조), ‘성경을 연구하다’(요한 5,38 참조),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우다’(1티 6,12), ‘평화를 이루다’(마태 5,9 참조)와 같이 성경 구절이나 경구에서 따온 이름들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적잖이 어색해 보이고 지나쳐 보이는 이 이름들을 널리 사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다가 차츰 그다지 어색하거나 지나치지 않은, 그러면서도 긍정적인 덕성들을 강조하는 이름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Amity(우호, 친선; 애칭으로 Amy), Charity(사랑), Faith(믿음), Grace(은총), Honor(영예; 또는 Honora), Hope(희망), Joy(기쁨), Patience(인내), Prudence(분별) 등의 이름들이 생겨났다. 드물기는 하지만 심지어는 Helpless(무력한), No-merit(별 볼일 없음), Repentance(회개) 같은 단어들도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는 이름이 갖는 의미뿐 아니라 이름의 실용성도 중요하게 여기는 듯이 보인다. 그래선지 주변에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유야 어떠하든 세상의 흐름이 그러할진대, 굳이 서양 이름을 고를 바에는 역사 안의 이런저런 사정을 알고 기왕이면 개신교에서 궁여지책으로 만들어 쓰던 이름들보다는 훌륭한 표양이 되는 가톨릭 성인들의 이름을 고르는 것이 어떨는지….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1월호, 이석규 베드로(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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