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04)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21) - 500년 약속의 성취 : 여호수아 (하)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 사제를 위한 영감
앞의 글 마지막 대목에서 요르단 강을 건널 때와 예리코 성을 무너뜨릴 때 사제들을 선봉에 내세웠음을 보았다. 사제들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은 ‘계약의 궤’를 들러 메고 앞장섰다. 그랬더니 맨발로 요르단 강 마른 땅을 건너는 기적과 예리코 성이 저절로 무너지는 기이한 일을 두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이 사실은 오늘날 사제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제는 누구인가? 사제는 하느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모든 것을 중재하는 사람이다. 특히 사람들의 발목을 묶는 온갖 굴레와 한계를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타파하도록 기도로써 중재하는 사람이다. 여호수아가 영도한 가나안 정착 과정에서 사제들이 한 역할은 21세기 사제들에게도 귀한 영감이 아닐 수 없다.
선봉에 서라. 불안, 두려움, 절망의 강(江) 도도한 물살 목에 차오르는 죽음의 소용돌이, 계약의 궤 번쩍 메고 앞장서 건너라. 엄위로운 야훼의 임장(臨場)에 드세던 강물은 절로 강둑이 되고 너희 맨발로 마른 땅을 밟고 건너리라.
선봉에 서라. 계약의 궤 번쩍 메고 사지(死地)에 첫발을 디디라. 너희 발걸음 닿는 곳 마다 생지(生地)가 되고 생명이 우글거리리라.
뿔 나팔을 불라. 일곱 바퀴 ‘때’가 찼을 때, 시작을 알리는 신호음을 내라. 그것으로 인하여 모두가 마음 모아 함성을 올리면, 하늘 메아리 광파, 핵파 능가하는 천둥번개로 구악(舊惡)의 성(城)을 허물리라.
뿔 나팔을 불라. 새 시대의 새벽을 열라. 잠들었던 모든 영혼들이 깨어나리라.
■ 별난 역사 의식
이윽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다음, 그들은 요셉의 유골을 스켐에 묻는다. 이 유골은 4세기가 넘도록 보존되어 왔다. 요셉의 유언을 따라 이스라엘 민족이 장차 가나안 땅에 입성하면 그곳에다 묻으려고 대를 이어 보존해 왔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요셉의 유골을 함께 들고 나왔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할 때에도 그들의 손에는 요셉의 유골이 들려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땅’에 입성했을 때 요셉의 유골은 비로소 안식할 곳을 찾게 된 것이다. 이로써 아브라함 때부터 500년을 기다렸던 약속은 이제 이루어졌다. 여기서 우리는 원대한 역사적 안목을 만나게 된다. 수백 년 전의 약속과 유언을 잊지 않고 그대로 이행하는 모습에서 역사를 길게 펼쳐보는 예지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또 하나의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여호수아 일행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정복했다’, ‘빼앗았다’와 같은 표현을 일절 쓰지 않았다. 대신에 여호수아기는 “이것은 이미 약속된 땅이다(여호 1,11 참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땅을 빼앗았다”라고 쓰면 이 말이 이후의 역사에 문제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약속된 땅을 받았을 뿐이다”라고 변론의 논거를 확보해 놓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하느님은 힘주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너희가 일구지 않은 땅과 너희가 세우지 않은 성읍들을 주었다”(여호 24,13).
기막힌 말씀이다. 가나안을 얻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야훼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지 결코 이스라엘의 공로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한마디로 은혜요 은총이라는 것이다.
■ 정착 마무리
가나안 정착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목 하나가 아이 성 전투의 패배(여호 7장 참조)다. 주님께서 함께하셨을 때는 예리코 성을 단 한 번에 무너뜨렸는데, 아이 성에서는 큰 군대를 데리고 갔어도 지고 말았다. 결국 야훼 하느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아무리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어도 지게 되어 있다. 반면에 우리가 아무리 약해도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바로 직전에 발생한 예리코 성 정착 때 ‘아칸’이라는 사람이 하느님의 분부를 어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리품에 욕심이 생겨 그것을 챙겼다. 분명히 하느님께서는 예리코 성의 모든 것을 없애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헤렘 법이라고 하는데 이는 점령한 곳의 모든 것을 야훼께 바치라는 법이다. 물건 같은 것은 다 불살라 바치고, 사람까지도 몰살시키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칸은 이 명령을 어겼던 것이다.
사실 헤렘 법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어떤 해명도 사람들을 온전히 만족시키기는 어렵다. 그런데 우리가 살다 보면 헤렘 법의 취지를 느낌으로 깨달을 때가 있다. 아주 작은 잘못이 번져서 전체 일을 그르치는 경우를 떠올려 보자. 우리는 후회하며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그때 그냥 그 첫 번째, 거기만 내가 발을 들여놓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런 꼴을 당하는 것이 아닌데….”
‘질투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아주 작게 한눈을 파는 것도 섭섭해 하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결벽증에 가까운 영적 순결을 원하신다. 이를 소홀히 여긴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함께해 주시지 않는다. 아이 성 전투 참패의 교훈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또한 성공과 실패의 공식인 것이다. 헤렘 법은 오늘에도 유효하다.
희한한 물건, 해괴한 형상, 집안에 들이지 마라. 예술의 이름으로도, 인테리어용으로도, 관광품 명목으로도, 괴이한 작품 숨겨놓거나 걸지 마라. 너희 경건이 야금야금 허물어질까 함이며, 거룩한 공간이 어둠에 물들까 함이다.
‘이까짓 것 하나가’ 하지 마라. 선이든 악이든 작은 불씨에서 비롯하니, 그 하나를 허투루 여기지 말 것이며, 번지기 전에 멸종시킬 것이니라.
여하튼 아이 성의 경험은 혹독했다. 이후 여호수아는 철저하게 야훼 하느님의 지시를 따른다. 그 결과 승승장구한다. 마침내 이스라엘 12지파가 각각의 땅을 분배받아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 이루고 세상을 떠날 때가 임박한 여호수아는, 선임자 모세처럼 이스라엘 전 지파의 지도자를 스켐에 모이게 한 후 고별 연설을 한다.
“이제 너희는 주님을 경외하며 그분을 온전하고 진실하게 섬겨라. 그리고 너희 조상이 강 건너편과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주님을 섬겨라.…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여호 24,14-15).
이에 백성들은 입을 모아 화답한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여호 24,18).
이렇게 정착과 신앙 갈무리를 다한 여호수아에게 성경은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문장을 헌정했다.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그리고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신 모든 일을 아는 원로들이 여호수아보다 장수하며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이스라엘은 주님을 섬겼다”(여호 24,31).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2월 8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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