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 교회읽기] 교회가 수호성인을 정하는 뜻은?
로마의 성 프란치스카(성 프란치스카 로마나)는 르네상스 시대에 로마의 귀족 기문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수도회에 들어가 하느님께 일생을 바치고자 하는 꿈을 가졌으나, 반대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2살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자녀 여섯을 낳아 키우면서 가정을 잘 꾸려 나갔다. 그런 한편으로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이나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자선사업도 펼쳐 나갔다. 특히 흑사병과 같은 악성 전염병이 돌거나 기근과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한층 더 병자나 빈민 구제에 동분서주했고, 필요하면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성인 자신의 가정에 불행이 닥쳐온 적도 없지 않았다. 남편과 장남이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가고, 차남과 딸을 갑자기 잃기도 했다. 그래도 성인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온갖 고통을 견뎌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 것을 두고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했다.
그런 한편으로, 혼자 힘으로는 구제 활동을 마음껏 펼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는 뜻을 같이하는 귀부인들을 모아 병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수도회를 설립했다. 또한 로마에 최초로 고아원도 열었다. 그리고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동안 지내오던 가정을 떠나 자신이 세운 수도회에 입회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성인은 하느님께 각별한 보호를 받았다고 한다. 이를테면 평소 수호천사와 아주 가깝게 지냈다는 것이다. 성인은 흑사병이 돌았을 때 둘째 아들을 잃었는데, 그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여 년 동안 늘 수호천사의 보살핌을 받았다. 천사가 곁에 있는 것을 환히 느끼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나 성인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어려운 이들을 보살피고 도왔는데, 수호천사는 성인이 밤에 칠흑 같은 로마 거리를 다니는 동안 동행하며 등불로 길을 비춰 주었다고 한다.
세례명으로 성인을 든든한 후원자로 영입
수호성인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가톨릭 신자들은 뒤가 든든한 사람들이다. 본인이야 그 점을 알든 모르든, 느끼든 말든 간에 사실이 그러하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직통이 가능한 이 대화 수단은 물론 기도이며, 이 수단에는 확실한 소통을 위한 옵션 기능이 추가되어 있다.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성인들의 중개가 그것이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은 하느님과 언제라도 직통으로 소통할 수 있을뿐더러, 개인의 탓으로 이것이 순탄하거나 원활하지 않을 때는 “저(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라는 말마디를 더 얹음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그 위에 모든 신자에게는 하느님께서 정해 주신 수호천사도 있다. 이보다 더 든든한 배경(?)이 어디에 또 있을까?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새로운 이름, 곧 세례명을 받는다. 이로써 그 이름의 주인공, 곧 하느님께 인정받는 성인을 든든한 후원자로 영입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교회는 우리가 하는 각종 일에도, 우리가 처한 여러 상황과 처지에도, 그리고 우리가 사는 지역과 장소에도 수호성인 또는 주보성인을 정해 준다. 우리가 언제 어느 처지에 있든 간에, 그리고 무슨 일을 하던 간에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배려이다. 그러기에 현대 최첨단의 직능 혹은 직종이라 할 수 있는 인터넷 분야에서도 우리는 수호성인(세비야의 성 이시도로)의 중개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삶의 거의 전 분야 또는 부문에서 수호성인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현대를 사는 우리와 아주 밀접하게 관계되는 이는 어쩌면 자동차를 운전하는 이들의 수호성인일 것이다. 교회가 운전자들의 수호자로 정해 준 성인으로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로마의 성 프란치스카, 그리고 성 크리스토포로가 있다.
로마의 성 프란치스카가 운전자의 수호성인이 된 데는 위에서 살펴본 전설이 근거가 되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이 전설을 바탕으로 프란치스카 성녀가 ‘말[馬] 없는 최신형 마차’, 곧 자동차를 모는 사람들의 수호자로서 적격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1925년에 자동차 운전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성인 자신의 행적이 아니라 성인의 단짝이던 수호천사의 행적 때문에 그렇게 정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생겨난 관행이겠지만, 해마다 3월9일 로마의 성 프란치스카 축일이 되면 로마의 운전자들은 거리로 차를 몰고 나와 교통 체증을 일으킨다고 한다. 아마도 수호성인의 가호를 몸소 체험하려는 뜻이 깃들어 있는 일탈이려니 싶다. 이렇듯 신자들을 위한 교회의 배려가 제대로 이해되거나 실행되지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은 듯하다.
언제, 어느 처지에도 수호성인의 도움 받아
또 예컨대 자동차를 가진 주변의 신자들을 보면, 참 많은 이들이 룸 미러에 묵주를 걸어 놓았다. 대개는 5단 묵주를 걸어 두었는데, 움직이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지 아예 칭칭 감아 놓았다. 그러다 보면 묵주에 달려 있는 십자고상은 자연히 대롱대롱 매달리는 상태가 된다. 왜 그렇게들 하는 걸까? 혹시 묵주에 무사고와 안전을 보장하는 영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교회가 정해 준 운전자의 수호성인이나 또는 자기 수호성인의 상(像)을 모시는 것으로는 부족한 걸까?
만약에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왕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자동차 안에 모셨으면 운전이라도 그분께 송구하지 않게 해야 할 것 아닌가. 어쩔 수 없이 혼잡하고 밀리는 길에서, 운전자들은 저마다 제 갈 길만 급하고 중요하고 바쁘다며 난폭하게 운전을 해댄다. 그러니 대롱대롱 매달린 십자고상은 당연히 심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문득 정교회, 특히 러시아 정교회의 십자가를 겸해서 생각해 본다. 다 알다시피, 이 십자가에는 가로 막대가 3개 있다. 가장 밑의 것은 예수님의 발을 받치는 받침대라고 한다. 그런데 그 받침대는 수평이 아니라 왼쪽이 높고 오른쪽이 낮게 기울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함께 처형된 오른쪽(우리가 볼 때는 왼쪽) 죄수의 회개와 믿음 고백에 느끼신 기쁨을, 그만큼 예수님의 오른발의 고통이 가벼워졌음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이 못에 꿰뚫린 채로 달리셔서 고통을 덜 받으시도록 받침대를 만들어 드리고, 기쁨으로 한 순간이나마 고통을 덜 느끼시기를 바라는 마음씀씀이가 아름답다. 그런 심정이라면 십자고상을 참으로 경건하게 모시지 않을까? 또 이런 마음가짐으로 운전을 한다면 참으로 조심스럽고 안전하게 하지 않을까?
오늘도 가톨릭 신자들이 차 안에 묵주를 걸어 두고서 나름대로 소신껏(?) 운전을 하는 동안. 예수님은 또 얼마나 휘둘리실까? 당사자는 예수님께서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리라 믿으며 마구 운전하겠지만, 일차적으로는 운전자들을 수호하도록 임명된 성인들이 더욱 바빠지실 것이다. 소임이 소임인 만큼, 그야말로 노심초사하실 것이다.
로마의 성 프란치스카 님과 성 크리스토포로 님, ‘그래도’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3월호, 이석규 베드로(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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