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아카데미] 신앙인의 윤리적 잣대 당신의 실천 온도는 몇 도인가요?
우리는 흔히 윤리(倫理)와 도덕(道德)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둘은 약간 다릅니다. 윤리가 사람과 사람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지켜야 할 도리와 규범’이라는 성격이 강하다면, 도덕은 이를 구체적인 상황에서 개인의 양심에 따라 실천해 나가는 것입니다. 학문에 비유하자면 윤리는 원론이요, 도덕은 각론이고, 마차에 비유하자면 윤리는 마차의 바퀴이고, 도덕은 그 바퀴를 굴려 목표점을 향해 나아간 자국이라 하겠습니다. 도덕적 실천을 위해 올바른 목표와 그에 도달할 수단을 제공하는 윤리가 필요하지만, 도덕이 되지 못한 윤리는 탁상공론에 불과합니다.
윤리 원칙 중에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가치라고 평가하는 부분이 바로 법입니다. 법의 토대에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공동체가 지향하는 목표인 윤리가 자리하며, 그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가령 헌법과 같은 법은 직접적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그에 따른 인권과 같은 가치를 지향하고 보호합니다. 도로교통법과 같은 실천적인 규정들도 직접적으로 윤리적 가치를 지향하지는 않지만, 인간 생명의 보호라는 가치를 간접적으로 지향합니다. 이처럼 법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윤리적 가치를 강제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최소한을 위한 마지노선이지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바는 아니지요. 따라서 법만 잘 지킨다고 도덕군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지난 2월 26일 헌법재판소의 간통죄에 대한 위헌선고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사회 구조 및 결혼과 성에 관한 국민의 의식이 변화되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다 중요시하는 인식이 확산됐다”며 “간통행위에 대해 이를 국가가 형벌로 다스리는 것이 적정한지에 대해서 국민의 인식이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를 반기기라도 하듯이 콘돔, 피임 관련 주식들이 대거 상승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습니다. 단지 일시적인 결과이거나 억측일 수도 있습니다. 간통죄가 형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하여, 민사재판에까지 가지 않는 무죄라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사회가 법에 담고자 하는 윤리적 가치의 내용, 혹은 그 마지노선과 우리 신앙인이 살아가야 할 윤리적 가치의 마지노선은 분명 다르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회사에서나 성당에서나 지역사회에서, 우리는 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또 그리스도인에게 윤리규범은 단순히 국민의 의식변화나 인식확산만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번에도 언급했듯이 교회는 사회교리에서도 가정에 대한 교회의 기존 입장을 확실히 합니다. 바로 성관계는 오로지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혼인관계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과 생명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고, 가정 안에서 부모와 함께 자랄 새 생명의 권리 또한 보장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어떤 윤리적 가치를 담기 위해 법을 제정하고 폐지하는가, 그 가치가 신앙인인 나에게도 타당한가, 나는 신앙인으로서 내가 살아가는 사회 안에서 윤리적인 가치를 실천하는 도덕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가, 아니면 윤리원칙이 바뀌기를 바라거나 내 입맛에 맞게 고치면서 자신이 도덕적이라고 합리화하는가…, 사회교리를 공부하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입니다. 내 실천의 온도는 몇 도인가요?
*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3월 15일, 김성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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