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08)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25) - 또 하나의 믿음의 여걸, 한나
두 돌 아들 약속대로 하느님께 봉헌한 독한 믿음
■ 한 맺힌 한나의 중얼중얼 기도
판관 시대가 끝나갈 무렵, 엘카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는 본처 한나와 후처 프닌나라는 두 아내가 있었다. 프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었으나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이것이 한나에게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었다. 특히, 매해 온 가족이 ‘실로’ 성전에서 제사를 바칠 때마다, 그녀는 수치스런 눈물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제사를 올리고 나서 가장 엘카나가 제물을 분배할 때, 프닌나는 자식들의 몫까지 챙겨 받았지만 한나 자신은 단지 한 사람 몫만 받아야 하는 꼴이 너무 비루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고기 양(量)은 그대로 남편 사랑의 비중을 상징하는 것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게다가 이를 빌미로 프닌나의 괄시는 점점 드세어졌으니, 한나의 신세는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사는 형국이었다.
참다못한 한나! 어느 해 그녀는 실로 성전 제사가 끝나자, 성전에 남아 한풀이 기도를 바친다.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 그리하여 당신 여종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습니다”(1사무 1,11).
기도하는 마음이 참으로 애처롭다. 또한 기도의 취지랄까 논리랄까가 독특하다. 아들을 낳아서 번듯하게 키워보고 싶다는 바람이 아니라, 그저 아들 하나만 낳게 해 주시면 그것으로 족하겠다는 가련하고 초라한 기도! 얼마나 ‘자식 못 낳는 여인’이란 손가락질이 한스러웠으면 이런 기도가 나왔으랴. 도로 ‘바치겠다’는 서원이 장한 믿음의 발로라기보다 협상용 카드로만 보여 더욱 짠하게 읽힌다.
그런데, 성전의 (주임)사제 엘리가 우연히 이 장면을 본다. 그가 보기에 웬 여인이 입술로 중얼중얼하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사제는 한나를 술 취한 여인으로 알고 꾸짖는다.
“언제까지 이렇게 술에 취해 있을 참이오? 술 좀 깨시오!”(1사무 1,14)
이에 한나가 답한다.
“저는 너무 괴롭고 분해서 이제껏 하소연하고 있었을 뿐입니다”(1사무 1,16).
마음이 어느 지경에 이르면 이런 기도가 나올까? 한나의 원(願)은 절절하다. 기운은 쇠잔해 있다. 하지만 작정을 하고 앉았기에 일어설 수도 없다. 그러함에 소리 없는 중얼거림으로 바치는 기도는 야훼 하느님의 경청에 이끌려 점차 삼매(=탈혼)에 잠긴다.
중얼중얼, 중얼중-어-얼, 언제 그치리이까 이 서러운 신세. 보셨죠, 방금 프닌나, 제 나중 것의 참을 수 없는 거드름. “여보, 당신에게 자식은 없지만, 내가 있지 않소!” 들으셨죠, 진즉 맘 뜬 지아비 엘카나의 영혼 없는 위로. 아시죠, 그네 멸시의 눈빛, 코웃음, 비아냥에 때 없이 울컥 이는 제 초라함.
응얼응얼, 응얼응-어-얼, 이 기구망측한 여종 어여삐 보아주소서. 나의 주님, 엎디어 눈물 뿌리오니, 이 처량한 꼴만은 면케 해 주소서. 오만한 제 다음 것 앞에서,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 낳게만 해 주소서. 나의 주님, 배냇소리 탄식으로 청하오니, 풀죽은 제 면(面)을 세워주소서. 딱 한번 만이라도 지아비에게서 “당신이 내 지어미” 고백 듣게 하소서. 나의 주님, 생명의 잉태 당신 뜻에 달린 것, 제게 사내 아이 하나만 점지해 주소서. 그저 한 번만 낳게 해 주소서, 도로 바치리이다. 그리만 된다면야, 무슨 원이 더 있으리이까.
흥얼흥얼, 흥얼흥-어-얼, 꿈이런가 생시런가, 홀연 황홀하구나. 샬롬 나의 하느님, “내가 프닌나라면 더 했을 터”, 찰나의 깨달음에 벌써 화평입니다. 어화둥둥 나의 하느님, 님께서 나의 미쁘신 연인(아가 2,16 참조), 이미 벅찬 영광입니다. 지화자 나의 하느님, 점입가경 사랑의 몽환 그대로 희열입니다. 찬양이로다. 감사로다. 해묵은 넋두리 구시렁거렸더니, 응답보다 더한 성령의 덮침(루카 1,35 참조)이로다. 흥얼흥얼, 흥얼흥-어-얼, 할렐루야, 아멘!
■ 독종 한나
속엣것까지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는(탈출 3,7 참조) 야훼 하느님께서는 결국 한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응답으로 아들을 얻게 된 한나! 그녀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 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다”(1사무 1,20). 그리고 그녀는 서약을 지켰다.
한나는 독종이다. 보통 독종이 아니다. 그녀는 아이를 ‘주님께 바치겠다’는 서원을 독한 마음으로 이행했다. 기한이 정해진 것도 아니었는데, 그녀는 아이가 젖을 떼자마자 사제 엘리 문하에 바쳤다. 엄마 편에서 보자면 만으로 두 살쯤 된 아이, 걸음마나 제대로 했을까 모를 아이와 매정하게 헤어진 것이다. 이게 보통 여성에게 가능한 일인가?
왜 그랬을까? 한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조금만 더 정이 들면, 유혹의 빌미에 넘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아이에게 필요최소한만큼 젖을 먹이고 마음 약해지기 전에 봉헌하겠다는 뜻을 남편 엘카나에게 분명히 밝혀두었다.
“아이가 젖을 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아이를 데리고 가서 주님께 보이고, 언제까지나 그곳에서 살게 하겠습니다”(1사무 1,22).
한나에게라고 어찌 모성이 없었으랴. “도로 바치겠다” 서약했으니, 낳은 정 위에 기른 정이 쌓여가면서 기일을 유보할 핑계야 얼마든지 생기지 않겠는가?
“주님, 막 젖을 떼려니까 얘가 이제 말문이 열리네요, 말 좀 가르쳐 주고 바칠게요.”
“그래도 걸음마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 뛰는 것 좀 보고 바칠게요.”
“아이고 주님, 그래도 예절 교육은 좀 시켜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 연후, 꼭 바칠게요.”
“….”
하지만 서원을 지키겠다는 한나의 의지는 결연했다. 이윽고 젖을 떼자 한나는 눈 딱 감고 사무엘을 봉헌한다. 그 때 실로 성전에서 바친 한나의 기도는 더 이상 한 평범한 여성의 기도가 아니었다. “제 마음이 주님 안에서 기뻐 뛰고
제 이마가 주님 안에서 높이 들립니다. 제 입이 원수들을 비웃으니 제가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처럼 거룩하신 분이 없습니다. 당신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저희 하느님 같은 반석은 없습니다”(1사무 2,1-2).
이어지는 기도의 장사슬(?)은 성경 속 믿음의 여인들이 바친 찬미노래와 곡률을 같이하며 공명한다. 굵은 글씨체의 기도문에 잠시 머무르노라면, 하느님을 향한 끓는 연모와 절대 의탁이 웅혼하게 약동하지 않는가.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3월 15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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