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아카데미] 올바른 교육 방향
교육, 하느님의 모상을 이끌어내는 일
무상급식, 등교시간, 사교육비 절감, 대학등록금과 같은 교육 이슈들이 가득합니다. 그때마다 교육 정책에 일관성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각자의 정치, 경제적 입장과 지위에 따라 첨예한 갈등이 조성되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도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가?’와 같은 담론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이제 교육은 개천에서 용이 나게 하는 촉매제도, 사회변화의 원동력으로서의 가치도 잃어버리고, 기득권의 세습을 위한 장치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거셉니다. 노력하는 교사들도 많이 있고,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부족한 부분을 좀 더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한 때 우리 사회에서 ‘마이클 샌델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질문 중 하나는 이렇습니다. 기차가 달리는데 브레이크는 고장이고, 눈앞에는 갈라진 철길이 놓여있습니다. 한쪽에는 여러 명의 노동자가, 다른 한쪽에는 한 명의 노동자가 있을 때 방향키를 쥔 나는 누구를 죽여야 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이를 두고 수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숫자의 문제와 사람의 가치를 단순히 명수로 계산할 수 있느냐에서부터 보다 복잡한 윤리적 담론에 이르기까지, 그 선택을 강요하는 철로의 설계와 설정 자체가, 다시 말해 이미 주어진 환경에서 결정을 강요하는 규칙은 폭력이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삶에서 반드시 어딘가에 서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 환경, 내가 만든 규칙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철길 위의 노동자일 수 있고,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누구를 죽일지 결정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시스템이 잘못되었다면 바꿔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 바뀌지 않았다면 어쨌든 각자의 위치에서 양심적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행동에 대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할 수만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조적인 악도 판단하시겠지만, 그 안에서 내 할 바를 했는가도 심판하실 것입니다.
양심적인 결단을 내리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부족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올바로 판단하도록 도와주는 일은 교육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입니다. 그렇기에 교육은 인간의 존엄성을 우선으로 가르쳐야 하고, 참여와 연대에 대해 가르쳐야 합니다. 또 학생을 교육의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해 결단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주체로서 대하면서 보조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가꾸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상적이라고 폄하할 것이 아니라, 교육의 주체인 학생들은 자신의 소명을 실현해야 하고, 나아가 사회의 규칙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정해진 틀을 바꿔나갈 힘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그리스도인 교육 선언」, 2항 참조).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 사회의 교육은 정해진 답을 강요합니다. 부족하다는 이유로, 아직 모른다는 이유로 학생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복음적이고 양심적인 판단을 하는 법을 아예 배우지 못하도록 마비시킵니다. 자유와 보조성은 없고, 강요된 답과 그에 대한 보상만이 있습니다. 역지사지의 원칙은 양시양비론으로 변질되어, 판단을 미루게 하고 복음적 실천을 방해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선택하고 지지하는 교육정책은 우리 아이들이 하느님의 뜻을 자신의 삶과 사회에서 실천하도록 도와주고 그럴 힘을 길러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과 재물이라는 우상을 쫓게 만들고 있습니까?
* 김성수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현재 고덕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3월 29일, 김성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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