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10)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27) - 도망자, 다윗 (상)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일거수일투족을 행한 ‘믿음’
■ 사울 왕과 소년 다윗의 운명적 인연
킹메이커 사무엘에 의한 소년 다윗의 발탁과 기름부음은 전적으로 사울왕의 몰락 과정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사울왕은 어떤 경위로 몰락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가? 초기의 사울왕은 성령의 카리스마로 외적을 훌륭히 무찔러가며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그는 필리스티아인과의 전쟁에서 전력의 열세에 두려웠던 나머지 오로지 사제 사무엘에게만 유보된 ‘제사’를 직접 올리는 과오를 범하는가 하면(1사무 13장 참조), 아말렉 군과의 전쟁에서 승리 후 헤렘 법을 어기고서 일부 사람들과 살진 가축을 골라 살려두는 잘못을 범했다(1사무 15,13-23 참조). 이 일로 사울왕은 하느님 눈 밖에 나게 되고 사무엘로부터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1사무 15,23)라는 절망적인 통고를 받게 되었다. ‘주님의 영’이 사울을 떠나자, 사울은 악령의 괴롭힘을 받는다(1사무 16,14 참조). 그는 이 악령을 몰아내기 위해 다윗을 궁중 악사로 들인다.
얄궂고도 운명적인 인연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하느님의 역사였다. 어떻게 됐든 왕위를 대물림해야 하니까 이처럼 두 인물이 자연스럽게 만나도록 하신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왕실에서 소년 다윗은 사울의 집안과 특별한 연을 맺게 된다. 사울의 아들 요나탄과는 후세에 빛나는 우정을 쌓았는가 하면, 딸 미칼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리하여 사울왕의 사위가 된 다윗! 운명은 이 둘 사이를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처지로 내몬다.
■ 천천만만
사울을 괴롭히는 악령을 몰아내기 위하여 궁중악사로 기용된 소년 다윗에게는 ‘주님의 영’이 줄곧 머무르고 있었다.
“주님의 영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
이는 다윗의 자의식이었다. 소년 다윗은 이 담대함으로 골리앗이라는 필리스티아 거인이 나타났을 때 감연히 나섰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막대기 하나를 들고 나간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듯한 다윗에게 골리앗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다윗은 골리앗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1사무 17,45).
결국 이 말에 다윗의 비밀이 있다. 다윗이 왜 훗날 임금이 되었는가?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일거수일투족을 행하는 믿음 때문이었다. 다윗은 결국 골리앗을 이겼다.
그 이후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출전하여 승리하는 다윗.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다윗 일행을 환영하며 여인들은 노래한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1사무 18,7)
사울은 이 얘기에 몹시 속이 상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을 돌리니, 이제 왕권 말고는 더 돌아갈 것이 없겠구나”(1사무 18,8).
그러면서 질투심에 사로잡힌 사울의 눈이 뒤집어진다. 그가 이렇게 민감해진 것은 사무엘과의 결별 때문이다.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보지 않았다”(1사무 15,35). 이 결별은 사울에게 아주 치명적이었다. 아직 신앙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사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이런 판에 ‘천천만만’이 나오니까 당연히 심사가 뒤집어질 수밖에 없다. “이놈만 죽이면 내가 임금 행세를 계속할 수 있는데….”
■ 어쨌든 기름부음받은이 아닌가
질투의 화신이 된 사울은 이제 다윗을 죽이려 한다. 그런데 번번이 실패하게 되고 오히려 자신이 두 번 궁지에 몰린다.
한 번은 엔 게디 광야로 삼천 명의 병사를 데리고 간 사울이 용변이 급해 컴컴한 동굴로 들어갔다. 아무도 안 보이는 그곳에, 마침 다윗 일행이 숨어 있었다! 다윗에게는 복수의 기회였다.
“제대로 들어왔습니다. 죽입시다”(1사무 24,5 참조).
그런데 다윗이 병사들을 말린다. 그리고 칼로 사울의 옷자락만 자른다. 자른 이유는 나중에 살려줬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면서 그때 다윗이 한 말이 후세에도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명언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인 나의 주군에게 손을 대는 그런 짓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어쨌든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아니시냐?”(1사무 24,7)
이렇게 다윗은 사울을 살려주었다. 이에 사울은 다윗에게 사과하면서 다윗을 큰 인물로 추켜세운 후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사람의 마음이란 어쩌지 못하는가 보다. 사울은 금세 또 마음이 변해 다시 다윗의 목숨을 노린다. 어느 날 다윗이 지프 광야 근처에 숨어 있다는 밀고를 받은 사울은 삼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다윗을 뒤쫓았다.
이를 알아챈 다윗 일행은 긴 여행에 지친 사울과 병사들이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 사울의 진영으로 몰래 숨어들었다. 다윗의 부하 아비사이는 사울을 죽이자고 했다. 그러나 다윗은 또 다시 “그분을 해쳐서는 안 된다. 누가 감히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고도 벌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1사무 26,9)며 만류했다. 대신 두 사람은 자신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증거로 창과 물병을 들고 나왔다.
이 내막을 알게 된 사울은 다시 다윗에게 사죄하고 복을 빌어주며 돌아갔다(1사무 26,21.25 참조).
사실 그때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사울은 다윗이 눈앞에 있을 때는 진심이지만 돌아서면 또 뒤집히는 것이다. 그래서 일이 자꾸 어그러지는 것이다.
도망자 다윗의 심경은 어땠을까? 목숨이 경각지세에 몰린 그의 절박한 심정을 그는 시편으로 읊었다. 거기 들지는 못했지만, 어느 어스름한 저녁 여우굴 바위 틈서리에 숨긴 고달픈 몸뚱이를 뒤척이며 다윗은 이런 기도를 바치지 않았을까.
하마터면,
“이자는 미치광이, 악령의 포로요 역천(逆天)죄인.
이자의 목숨을 저희 손에 붙이심,
하늘의 비상한 뜻으로 알겠나이다”
라고 말할 뻔 했습니다.
핏발 선 눈으로
사냥감을 좆듯 불철주야
제 비틀거리는 발자국을 추적하던 그.
밤잠 설치면서 시기로 날을 간 비수 번뜩이며
노기(怒氣) 앞세우고 제 목숨을 노리던 그.
이윽고 외려 그의 등짝이 송두리째
동굴 칠흑의 침묵 속에 잠복한 저희 칼끝 앞에
무방비로 성큼 던져진 찰나,
제 입술은 병사들의 복수심을 만류하며
본심을 빗겨간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아니시냐?”(1사무 24,7)
본심보다 더 깊은 ‘속마음’이었습니다.
기름부음받은이는 주님의 사람.
기름부음받은이는 주님의 소관.
세우는 것도 주님의 권한, 폐하는 것도 주님의 결정.
하오니 저 토로가 변덕 없는 제 노래이게 하소서.
행복하도다, 어쨌든 그분의 그림자를 밟지 않는 이.
행복하도다, 어쨌든 그분의 영역을 한 뼘도 넘보지 않는 이.
행복하도다, 어쨌든 그분의 인호를 경외하는 이.
아멘!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3월 29일, 차동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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