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15)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32) - 하느님의 승부사, 엘리야 (상)
바알 예언자들에게 승리한 후 이내 낙심하는데…
■ 엘리야의 등장
이야기의 향배는 이제 솔로몬 통치 이후, 통일왕국이 분열되고 우상 숭배에 빠져 야훼 하느님의 눈 밖에 난 왕들이 속출하던 시대로 넘어간다. 대표적인 예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들 수 있다.
문제는 아합 왕이 이방국 시돈 왕의 딸 이제벨과 결혼을 하면서 시작된다. 바알을 섬기던 이제벨의 이스라엘 진출은, 곧 바알의 이스라엘 진출을 의미한다. 본디 가나안 토착 원주민의 신이었다가 이스라엘 12지파의 정착과 함께 공식적으로 쫓겨났던 바알이 이제 어엿하게 다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 영향 하에 아합 왕 역시 바알을 섬기게 된다. 이는 우상 숭배 정도에 빠진 것이 아니라 아예 종교를 바꾼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궁중에다 바알과 바알의 부인 아세라를 들인다. 그리고 바알 예언자 450명과 아세라 예언자 400명을 궁중에 두고 그들의 얘기만 들으며 국사(國事)를 농단한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엘리야가 나타난다. 그냥 “길앗의 티스베에 사는 티스베 사람”(1열왕 17,1)이라고 출신만 짤막하게 언급된 채 상세한 프로필이 없이 불쑥 역사의 한 무대에 등장한다. 엘리야는 아합 왕을 단독 면담하여 우상숭배에 대해 경고하고 가뭄을 예언한다(1열왕 17,1 참조).
이후 삼년이 지나, 기근이 절정에 달하자 엘리야는 여전히 바알을 섬기던 아합에게 나타나 말한다. “카르멜 산에서 진검 승부를 합시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카르멜 산으로 모으고, 바알 예언자 450명과 아세라 예언자 400명도 그곳으로 모아 주십시오”(열왕 18,19 참조).
■ 카르멜 산의 진검승부
당시 백성들은 ‘전쟁’에 관련해서는 야훼 하느님께 빌었다. 하지만 ‘비’에 관한 문제는 바알에게 가서 빌었다. 바알이 농사일을 관장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에 대해 엘리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질책한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1열왕 18,21).
하지만 지도자나 백성들의 반응은 시큰둥하였다. 엘리야는 뭔가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아합 왕에게 도전장을 냈던 것이다.
엘리야는 바알 예언자들에게 먼저 차례를 주었다. 하늘에서 불을 당겨 내리는 예언자가 참 예언자로 판명 나는 영적 대결이다. 이들은 엄청난 장작을 쌓아 놓고 바알과 아세라를 부른다.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그야말로 난리굿이다. 절름발이 동작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악기도 타고, 나중에는 칼로 자해도 한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불이 안 붙는 것이다. 드디어 엘리야 차례가 된다. 엘리야는 우선 야곱의 자손들 지파 수대로 열두 개의 돌을 가져다 허물어진 야훼의 제단을 쌓는다. 그리고 주변에 도랑을 파고 거기에 물을 붓게 한다. 사람들이 나중에 무슨 수법을 썼다면서 무효라고 할까봐 그런 것이었다. 준비를 마치고 엘리야는 조용히 기도한다.
“야훼 하느님이시여, 제 기도를 들어 주소서”(1열왕 18,36-37 참조).
그때 불이 임한다. 이 불은 제단 위에 있는 제물과 장작뿐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모든 것까지도 태워버린다. 이것을 본 모든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아! 알았습니다. 야훼께서 하느님이십니다”(1열왕 18,39 참조).
이로써 야훼 하느님이 참 하느님으로 판명된다. 그리고 마침내 가뭄의 땅에 큰비가 쏟아져 내린다. 야훼만이, 그리고 그분의 ‘말씀’만이 비를 멎게도 하시고 주기도 하시는 유일한 하느님이었던 것이다. 850명의 바알 예언자들은 순식간에 남김없이 심판을 받았다. 그리하여 야훼 신앙은 승리하고 바알 신앙은 패배하였다.
■ 치명적 슬럼프에 빠지다
이 전대미문의 엄청난 사건은 희한하게도 극적인 반전으로 이어진다. 카르멜 산의 대승리는 이제벨의 강력한 재도전으로 인하여 곧바로 퇴색된다. 그토록 화려한 대승리가 있은 직후에, 그렇게 처절할 수 없는 엘리야의 좌절이 뒤따른 것이다. 카르멜 산에서의 소식을 들은 이제벨이 엘리야에게 강력하게 선전포고를 한다.
“니가 엘리야면 나는 이제벨이다.”
사실 여기에는 말장난이 있다. ‘엘리야’는 “야훼는 나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또 ‘이제벨’은 “왕이 어디 계시냐?”라는 뜻이다. 결국, 이는 “너에게는 야훼가 하느님이냐? 그렇다면 나에게는 바알 신이 있다”라는 반격인 셈이다. 시쳇말로 “한번 붙어 볼까?”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방금까지만 해도 승승장구하던 엘리야가 이상하게 갑자가 풀이 죽어서 도망을 친다. 로뎀나무 곧 싸리나무 숲 밑에 와서 푸념을 한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제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1열왕 19,4).
그러고 나서 싸리나무 덤불 아래 그대로 누워 잠들었다(1열왕 19,5 참조). 영영 깨어나지 않을 것을 희망하면서. 하늘의 천사들이 나타나 흔들어 깨우면서 제공한 불에 달군 빵과 물 한 병을 마시고는 또 다시 누워 잠이 들었다(1열왕 19,6 참조). 성경에서 같은 문장이 반복될 때는 꼭 주목해 읽는 것이 정통 묵상법이다. 거기 뭔가 특별한 의미가 강조되고 있기 까닭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구절 “누워 잠이들었다”가 반복되고 있음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한마디로 엘리야 예언자가 그만큼 낙심하여 의기를 상실했다는 얘기다. 그의 기도에 원격으로 귀 기울여 보자.
여기
로뎀나무 그늘 아래
제 지친 심신 눕힙니다.
축 늘어진 투혼(鬪魂)
이대로 잠들고 싶습니다, 미련 없이.
차라리 제 생을 거두어 주소서, 영영.
거기
카르멜 산 정상에서
아합 왕과 그의 졸개 짝퉁 예언자 850명을
홀로이 맞서느라
저는 이미 혼신(魂神)과 영검(靈劒)을 소진한 몸….
징글맞습니다, 집요한 저네들의 악다구니.
남편 아합의 통분을 대신하여 이제 악명 높은 이제벨이
바알과 아세라의 이름으로
제 목숨을 노린다는 풍문에
저는 두려움조차 방전한 채
무기력으로 흐느적댑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저는 홀로!
세상을 호령할 막강 군사통수권을 지닌 저네 앞에,
저는 그저 초라한 일개 백성일 뿐.
아무리 제 이름 엘리야(elijah)가
“야훼는 나의 하느님”을 뜻해도
겁 모르는 철부지 우상 왕권(王權) 눈에는
한낱 무모한 역모자(逆謀者)일 뿐.
야훼, 나의 하느님!
카르멜 산의 추억에 제 마음 자족하고,
저네들의 몰양심(沒良心)한 목숨놀음에 제 맥이 풀리고,
에이는 고독에 사무쳐 제 영혼 무너나오니,
이대로
지금 이대로
영원한 안락(安樂)에 들게 하소서.
부디 허하여 주소서.
하지만, 천사들은 다시 그를 흔들어 깨워, 40일 동안 수발을 하며 호렙 산으로 데리고 간다. 이제 결정적인 대목에 왔다.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5월 3일, 차동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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