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17)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34) - 영검(靈劍)의 예언자, 엘리사 (상)
막무가내 기도, 스승 엘리야의 영검 받아내다
■ 쟁기를 부수고 엘리야를 따르다
엘리야의 시대가 끝을 향하고 있을 무렵,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아벨 므홀라 출신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기름 부어 그의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울 것을 명하셨다. 바로 호렙 산 기도중의 일이었다.
엘리야는 하산하여 돌아오는 길에서 엘리사를 만나 주님의 분부대로 행했다. 마침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로 밭을 갈고 있는 중이었다. 엘리야는 자신의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엘리사는 이것이 “너는 내 제자가 되거라”라는 거룩한 초대임을 금세 알아차렸다.
“하느님은 구원이시다”를 뜻하는 엘리사! 그는 이름 뜻에 걸맞게 화끈하게 응답했다. 그는 잠시의 고민도 없이 즉시 움직였다. “엘리사는 소를 그냥 두고 엘리야에게 달려와 이렇게 말하였다”(1열왕 19,20). 그는 즉시 내린 결단을 엘리야에게 전하면서 마지막 작별인사의 말미를 청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1열왕 19,20).
엘리야는 쾌히 수락하였다. 엘리사의 작별인사에는 뭉클한 그 무엇이 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부리던 황소 두 마리를 잡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워 사람들을 대접하였다(1열왕 19,21 참조). 혹여 나중에 딴 마음이 들어 귀향의 유혹이 들 때를 대비해서 돌아갈 빌미를 태워버린 것이었다. 그런 뒤에야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갔다.
■ 두 배의 영검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다닌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이제 엘리야는 하늘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고, 아무도 모르게 ‘승천행’(?)에 오를 기회를 찾는다. 그러려면 일단 엘리사를 떼어 놓아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너는 여기 남아 있어라. 주님께서 베텔까지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2열왕 2,2).
하지만 엘리사는 미구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임을 눈치 챈다. 하여 그는 물러서지 않고 굳이 스승 엘리야 주변에 머물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이런 식의 거룩한 실랑이가 세 번이나 거듭된다(아랫 글 참조). 이쯤 되자, 엘리야가 흡족한 듯 말한다.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너에게 해 주어야 할 것을 청하여라”(2열왕 2,9).
엘리사의 청이 걸작이다.
“스승님 영(검)의 두 몫을 받게 해 주십시오”(2열왕 2,9).
이 말을 들은 스승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는 난색을 드러내며 말한다.
“너는 어려운 청을 하는구나.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대로 되겠지만, 보지 못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2열왕 2,10).
주고 안 주고는 자신의 결정에 달린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달린 것이라는 답변! 과연 엘리야다운 예지다.
하느님께서는 엘리사의 청원을 들어주셨다. 그것도 그저 그렇게가 아니라 스펙터클한 장면으로 응답해 주셨다. 엘리사로 하여금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장엄하게 하늘로 귀향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게 해 주신 것이었다. 이에 엘리사는 자신의 옷을 찢어버리고 엘리야가 하늘을 오르면서 떨어뜨린 겉옷을 대물림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와 함께 자신의 소원대로 스승 엘리야의 영검이 자신에게 임한 것을 강물을 가르는 기적으로 즉시 체험하게 된다. 이로써 구약성경의 귀한 여러 페이지를 장식하는 엘리사의 이적 이야기들이 시작된다.
■ 끝장 믿음
제자 엘리사를 떼어 놓으려고 스승 엘리야가 베텔로 내려가겠다고 말했던 대목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스승의 말에 엘리사는 이렇게 응수한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고 스승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저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2열왕 2,2).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베텔로 내려간다. 이런 식의 대화와 동행이 ‘예리코’ 행 그리고 ‘요르단 강’ 행, 이렇게 두 번이나 더 이뤄진다. 도합 세 번! 장소만 바뀌었지 대화의 내용이 토씨까지 똑같다. 이는 거기에 매우 중요한 영적 깨달음의 단서가 있다는 성경진술 방식이다. 진흙 속에 묻힌 진주는 바로 엘리사의 말이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고 스승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저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세 번 거듭된 이런 불퇴진의 신앙적 집념이 엘리야 나아가 하느님의 심금을 움직여, 엘리사로 하여금 스승 엘리야가 남길 영검의 두 몫을 받게 해 주었던 것은 아닐까. 추론이 아닌 직관으로 오는 깨달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리는 기적 이야기에서, 수넴 여인의 입에서 발설된 똑같은 ‘생떼’에 설복당하고 만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고 어르신께서 살아계시는 한, 저는 결코 어르신을 떠나지 않겠습니다.”(2열왕 4,30)
엘리사 자신의 어투와 완전 판박이다. 이 집요한 청원을 엘리사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2열왕 4,31이하 참조).
‘생떼 기도’라 할까 ‘끝장 기도’라 할까. 어떻게 부르든 우리는 이와 한통속인 기도들을 당시 기준으로 아득한 윗대에서 그리고 까마득한 아랫대에서도 발견한다.
야뽁강 나루터에서 야훼의 천사와 씨름을 하면서 바쳤던 야곱의 기도소리는 여전히 옹골차게 들린다.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드리지 않겠습니다.”(창세 32,27)
예수님께서 끈질기게 기도할 것을 격려하며 비유말씀의 예로 든 ‘과부’의 청원에서는 끝장 정신이 물씬 묻어난다. “그(과부)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하고 졸랐다.”(루카 18,3)
문득 무릎이 쳐지건대, 이들의 기도는 고스란히 오늘 우리들의 기도소리로 되살아나야 하지 않을까.
저는 당신이 부르신 예언직에 제 생의 외통수를 놓고 쟁기를 부수었습니다. 두 몫의 영검을 받을 때까지,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제 아들이 죽었습니다. 몸소 왕림하여 살려주실 때까지, “결코 어르신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제 형 에사우에게 장자권을 도로 빼앗길까봐 죽도록 산란합니다. 보장의 약속을 받을 때까지, “놓아드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저와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때까지 “줄곧 졸라댈 것입니다.”
제가 진퇴양난 막다른 골목에 처했습니다. 저에게 도움의 손길이 내려올 때까지 이 기도의 외줄을 놓지 않겠습니다.
오냐, 너 엘리사야, 네 믿음의 근기(根氣)가 굳세어, 내 아니 들어줄 수가 없구나.
오냐, 너 수넴의 아낙아, 네 절절한 애원이 야무져, 내 거절할 수가 없구나.
오냐, 너 야곱아, 네 집요한 기구(祈求)가 옹골차니, 내 기꺼이 강복하마.
오냐, 너 홀어미야, 네 가련한 생떼가 옴팡지니, 내 정녕 네 편이 되어주마.
오냐, 너 아무개야, 네 다급한 애소가 절박하니, 나 하늘을 찢고 너를 도우마.
예수님께서는 이런 막무가내 기도를 확실하게 응원해 주신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루카 18,7)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5월 17일, 차동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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