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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119: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36 - 막장 예언자, 호세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06-02 조회수2,300 추천수0

[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119)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36) - 막장 예언자, 호세아

우상에 빠진 이스라엘, 바람난 여인에 비유



■ 기구망측한 부르심

예언자의 운명은 고달프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 환영받을 줄 알았는데, 대부분 섣불리 말씀을 전하였다가 봉변당하기 일쑤였다. 거부나 비웃음을 넘어 박해받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이유는 예언의 내용이 청자의 비위를 건드리거나 심사를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쩔어있는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외려 축복, 치유, 격려의 말씀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려진 말씀은 힐난, 경종, 나아가 심판 일색이었던 것이다.

호세아! 그는 이런 포괄적 진술을 벗어나는 특이한 운명의 예언자였다. 호세아는 엘리야와 엘리사 이후, 아모스에 이어 불리움을 받았다. 그는 유다 임금 우찌야,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시대에, 그리고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스의 아들 예로보암 시대에 활약했다.

야훼의 영이 돌연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덮쳤다. 그에게 예언 말씀이 임하여 그로 하여금 뜬금없이 고메르라는 이름의 창녀와 결혼하도록 명하신다.

“너는 가서 창녀와 창녀의 자식들을 맞아들여라. 이 나라가 주님에게 등을 돌리고 마구 창녀 짓을 하기 때문이다”(호세 1,2).

그가 말씀을 받들어 결혼을 하니, 곧 아이가 들어선다. 아비가 누구인지는 고메르만이 안다. 호세아는 이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인다.

첫 아이는 아들이었는데 하느님께서는 그를 ‘이즈르엘’이라 부르도록 작명하여 주셨다. 이는 예후 임금이 이즈르엘 광야에서 무죄한 이들을 죽인 죄 값을 기억하겠다는 의미다. 이름 자체가 예언의 취지를 내포하고 있다!

둘째는 딸이었는데 ‘로 루하마’라 이름 붙여 주셨다. 이는 ‘가엾이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을 ‘천덕꾸러기’로 여기시겠다는 경종인 셈이다.

셋째는 아들이었는데 ‘로 암미’라 부르도록 하셨다. 이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당신 백성이 아니라는 엄포의 표현이다.

이처럼 비정상적인 가정의 구성은 한마디로 우상숭배에 빠진 상황을 ‘간음’으로 그려내는 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사실들은 잠시 신학적으로 숙고해 볼 가치가 있다. 혹자는 말할 수도 있다. “아니, 예언자도 인격이 있고 자기 삶이 있는데, 아무리 하느님의 주도적 결정이라 해도 너무 잔혹한 처사다!” 충분히 일리 있는 변론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접근은 공연히 시간만 낭비할 따름. 우리는 ‘호세아’에게 담보될 영적 배상을 전적으로 하느님 자비에 맡길 줄 알아야 한다. 대신 여기서 우리는 보다 지혜롭게 물음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도대체, 왜 호세아는 바람난 여인과 살아야만 했는가? 또 저주에 가까운 세 자녀의 이름들은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 것인가?”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 별스런 설정들이 모두 하느님의 애간장 녹는 심사를 드러내는 상징으로 기능한다는 것! 아무리 격한 질타와 절절한 호소로도 더 이상 통하지 않으니까 하느님께서는 가장 쇼킹한 상징을 동원하고 계신 것이다. 단, 억지 강압이 아니라 호세아 예언자의 자발적 순명을 유도하면서 말이다.


■ ‘19금 언어’ 예언 메시지

호세아에게 하느님 말씀이 내리자, 그의 입술은 이스라엘의 죄상을 바람난 여인에 비유하여 고발한다. 바알에 홀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란 꼭 정부에 홀딱 빠진 여인의 독백과 같다.

“양식과 물 양털과 아마 기름과 술을 주는 내 애인들을 쫓아가야지”(호세 2,7).

그러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야훼 하느님’이 그리워지면, 첫정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심경이 된다.

“이제 가야지. 첫 남편에게 되돌아가야지. 그때가 지금보다 더 좋았는데 ……”(호세 2,9).

호세아는 이런 우상숭배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고발한 후, 심판의 예언 말씀을 선포한다.

“나는 바알들의 축제일 때문에 그 여자를 벌하리라. / 그 여자는 바알들에게 분향하고 / 귀걸이와 목걸이로 단장한 채 / 애인들을 쫓아갔다. / 그러면서 나를 잊어버렸다”(호세 2,15).

그 사이 호세아의 아내는 또 집을 나가버린다. 하느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집나간 아내를 데려다 살 것을 명하신다. 호세아는 군말 없이 따른다. 그는 은 열다섯 세켈, 그리고 보리 한 호메르와 한 레텍으로 그 여자를 사들인다. 분부를 내리신 하느님도 하느님이시지만, 호세아도 대단하다. 집나간 아내가 다시 돌아와도 받아줄지 말지 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몸값을 지불하고 다시 데려온다? 여간한 무심(無心)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어쨌건, 호세아가 우상숭배를 고발하는 대목은 너무 선정적인 표현들이 거침없이 뿜어져 나와서 읽기도 민망스럽다. 왜 이런 언필칭 ‘19금’ 단어와 문장들이 여과 없이 사용되고 있는 것일까? 바로 야훼 하느님의 속 타는 심정을 절정으로 그려내고, 그 지점에서 하느님의 애절한 호소를 극적으로 전하기 위함이다.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 6,4.6).

새 번역에서 ‘신의’로 번역된 원어 ‘케세드’는 ‘충성’, ‘사랑’, ‘자비’, ‘긍휼’ 등의 의미가 있으며, 신약성경에서는 대부분 자비로 사용되고 있다. 공동번역은 이를 ‘사랑’으로 번역하고 있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 제물을 바치기 전에 /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호세 6,6 공동번역).

‘하느님을 아는 예지’라는 명사형 문장을 ‘하느님의 마음을 알아다오’라는 동사형 문장으로 바꾸니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짝사랑이 더욱 호소력 있게 전해진다. 바람난 여인같이 신앙의 여정에서 갈팡질팡했던 우리의 배신을 생각하면, 이 애소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마치 지구의 중력처럼 아무런 감정이 없는 비인격적인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호세아가 전하는 하느님은 고감도 정감을 지니셨다. 그러기에 당신 백성들에게 미련스런 사랑을 고백하고, 오롯한 연정에로의 회귀를 애걸복걸하시는 것이다.

필경 호세아는 예언 말씀 선포 이전에 하느님의 바보 같은 사랑에 눈물 콧물로 공감하였으리라.

마누라가 집을 나갔습니다.
또 나갔습니다.
또 또 또, 어느 놈과 눈이 맞았습니다.
주님, 그걸 죽일까요 살릴까요.

“다시 데려다 살거라.
나는 더 속 탄다.
내 가슴은 더 곪고 있다.
너희들한테 당한 배신감을 무엇에 비기랴.”

주님, 제 심장이 터질 것 같습니다.
바람난 마누라도 마누라지만,
우상과 구습에 쩔은 저 백성,
아무리 주님 애정을 강하게 전해 주어도,
들은 둥 못들은 둥, 건성으로 제물을 바치는 꼴들이
통절하기 짝이 없습니다.

“호세아, 네가 내 위로다.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사랑에 관한한 나는 버림받은 자이며, 소박데기!
너 하나만이라도 내겐 치유이니, 너는 끝내 내 사랑으로 남거라.
제발, 제발, 제발.”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5월 31일,
차동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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