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120)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37) - 전설의 왕, 히즈키야
“낫게 하소서” 탄원 기도, 하느님 마음 움직여
■ 찬란한 치적
히즈키야는 다윗 왕 이후, 솔로몬에 이어 가장 훌륭한 왕으로 꼽힌다. 그에 대한 열왕기의 기록은 찬란하다.
“그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신뢰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유다의 모든 임금 가운데 그만 한 임금이 없었고, 그보다 앞서 있던 임금들 가운데에서도 그만 한 임금이 없었다”(2열왕 18,5).
그가 이토록 전무후무한 왕으로 평가받게 된 이유는 명료하다.
“그는 자기 조상 다윗이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다”(2열왕 18,3).
실제로 그는 왕위에 오른 후, 성전을 수리하고 청결케 하는 등, 일종의 성전 정화작업을 하는 것으로 통치를 시작했다(2역대 29,3 참조).
그는 산당들을 없애고 기념 기둥들을 부수었으며, 아세라 목상들을 잘라 버리는 한편,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깨부수었다. 이는 느후스탄이라고 불리던 그 구리 뱀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때까지도 향을 피우며 제물을 바쳤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그는 축제일을 엄격하게 지키게 하는 등, 절기 전례를 다시 부활시켰다.
히즈키야는 개인적으로도 허물없는 삶을 살았다. 그는 여느 왕들처럼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고, 오직 야훼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면서 야훼께서 모세에게 주신 계명들을 준수하였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시며 그로 하여금 승승장구하게 하셨다.
■ 아시리아의 침공을 물리침
히즈키야 왕은 스물다섯에 즉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스물아홉 해를 치세하였다(2열왕 18,2 참조). 그가 남왕국 유다를 통치하고 있을 때, 북왕국 이스라엘은 호세아 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예언자 호세아와는 다른 인물이다. 참고로 호세아, 여호수아, 예수는 다 같은 이름으로 모두 ‘야훼께서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이는 전라도 발음 다르고, 경상도 발음 다르고, 서울 발음 다르듯 발음이 조금씩 다른 이치다.
히즈키야는 제육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하는 꼴을 겪는다. 이는 이스라엘 왕 호세아 제구년의 일이었다. 동족의 입장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뼈아프게 바라만 보아야 했던 일이었다.
그랬는데 몇 년 지나지 않아 남왕국 유다에 똑같은 위협이 닥쳤다. 히즈키야 왕 제십사년에 아시리아 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략하여 모든 요새화된 성읍들을 점령하였다(2열왕 18,13 참조). 히즈키야는 호락호락하게 항복하지 않았다. 우선 적진의 퇴각을 유도할 요량으로 성 밖의 모든 샘들과 물줄기를 막아버렸다. 그리고 그는 용기를 내어 허물어진 성곽을 수축하고 망대들을 높이고 성 밖에 또 성을 쌓았다(2역대 32,5 참조).
허나 그 정도로 포기할 아시리아 왕이 아니었다. 그는 전군을 거느리고 ‘라키스’ 성읍을 공격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대신들을 보내어 온 백성들이 듣는 가운데 히즈키야 왕의 패전과 야훼 하느님을 모독하는 욕설을 떠들어 대도록 하다가, 급기야 하느님을 조롱하고 비방하는 편지까지 써서 보냈다.
“저희 백성을 내 손에서 구해 내지 못한 세상 민족들의 신들처럼, 히즈키야의 하느님도 제 백성을 내 손에서 구해 내지 못할 것이다”(2역대 32,17).
이에 히즈키야는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 예언자의 도움을 청하여, 그와 함께 하늘을 우러러 보고 울부짖으며 기도하였다(2역대 32,20 참조). 하느님께서는 이 기도에 응답하시어 천사들을 보내시어 아시리아의 진지에 있는 지휘관과 사령관 이하 전군을 쓸어 버리셨다. 아시리아 왕은 부끄러워 얼굴도 들지 못하고 돌아가 자기 신전에 들어갔다가 거기에서 친자식들의 칼에 최후를 맞았다(2역대 32,21 참조).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히즈키야와 예루살렘 백성들을 아시리아 왕 산헤립과 모든 적의 손에서 구원하셨다. 당시 아시리아 제국의 국제적 위용을 고려할 때, 히즈키야 왕의 승전담은 가히 전설적인 것이었다. 이 소문은 널리 퍼져나가 히즈키야는 모든 민족들 앞에서 들어 높여졌다(2역대 32,23 참조).
하지만! 히즈키야는 결정적인 잘못을 범했다. 그는 그 전공(戰功)을 야훼 하느님께 돌리지 않고 자신의 업적으로 여기는 교만에 빠져, 받은 은혜에 보답하지도 않고 감사도 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를 역대기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래서 주님의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렸다. 히즈키야는 마음이 교만하였던 것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주민들과 함께 자신을 낮추었다. 그래서 히즈키야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주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닥치지 않았다”(2역대 32,25-26).
■ 면벽(面壁) 기도
모름지기 바로 저런 연유에서였으리라. 히즈키야 왕은 돌연 죽을병에 걸려 몸져누웠다. 그런 그에게 이사야 예언자가 절망적인 소식을 전했다. 하느님 말씀은 냉혹했다.
“너의 집안일을 정리하여라.
너는 회복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2열왕 20,1).
그러자 그가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주님께 기도하였다. 이른바 ‘면벽 기도’였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2열왕 20,3).
그러고 나서 히즈키야는 슬피 통곡하였다. 나는 그 대목을 전하는 성경 갈피에서 목소리 낭랑한 환청을 듣는다.
“너의 집안일을 정리하여라.
너는 회복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2열왕 20,1).
무어라 말하리이까?
당신 몸소 제게 말씀하셨고
당신 친히 정하신 일인데!(이사 38,15 참조)
그저, 벽을 바라보며
슬피 통곡할 뿐.
낮이면 제비처럼 애타게 부르짖고
밤이면 비둘기처럼 구구구 울어댑니다(이사 38,14 참조).
제 순정을 어여삐 여겨 주소서, 오롯이 주님만 믿어온 생이었나니.
제 열정을 가상히 보아 주소서, 그 뒷심에 산당과 우상들을 훼파했나니.
제 수고를 후히 셈하여 주소서, 열매는 아니라도 선의 씨앗들을 뿌렸나니.
무엇보다도 제 지조를 참작하소서, 입때껏 주님 아닌 것에 마음 준적 없나니.
비록
알량하고
초라하고
보잘 것 없사오나
이것이 제가 내어 보일 모든 것!
아아, 터럭 같은 저 선의(善意) 담보로 쳐주시어
부디 제게 날들(days)을 하사하소서.
정녕 저를 낫게 해 주소서, 저를 살려 주소서(이사 38,16).
기도는 하느님 심부를 건드렸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다시 내려 주신 응답의 말씀은 이랬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이제 내가 너를 치유해 주겠다. 사흘 안에 너는 주님의 집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다섯 해를 더해 주겠다. 그리고 아시리아 임금의 손아귀에서 너와 이 도성을 구해 내고, 나 자신과 나의 종 다윗을 생각하여 이 도성을 보호해 주겠다”(2열왕 20,5-6).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6월 7일, 차동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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