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으로 풀어보는 교리]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음을 저를 믿나이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이유
예수님께서 딱히 율법을 어기셨다고 할 것이 없는데도,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그분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의 눈에 거슬린 예수님의 행동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는 것, 그러느라고 단식과 기도를 소홀히 했다는 것,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는 것,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주었다는 것 정도밖에 없었는데 말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특히 율법과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일 때문에 예수님을 반대하게 되었지만, 그들에게 진정으로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죄인들을 용서해주시는 예수님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런 일은 하느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으셨다고 해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 모두가 예수님을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바리사이였던 니코데모나 고관이었던 아리마태아사람 요셉 등은 예수님의 숨은 제자들과 같은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지도자들 가운데에서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바리사이들 때문에 회당에서 내쫓길까 두려워 그것을 고백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보다 사람에게서 받는 영광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다.”(요한 12,42.43)
예수님 수난의 책임은 우리에게도
가톨릭교회교리서는 “모든 죄인이 그리스도 수난의 장본인이었다.” “죄인들 자신이 하느님이신 구세주께서 겪으신 모든 고난의 장본인이었고 그 도구였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598항) 나아가 교리서는 예수님의 처형에 대한 가장 중대한 책임은 유다인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것은 우리의 죄인 만큼, 타락과 악에 빠지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마음 안에서, 그들 안에 계신 하느님의 아들을 거듭 십자가에 못 박고 욕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우리의 죄가 유다인들의 죄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598항)
예수님의 자발적인 수난
“스스로 원하신 죽음이 오자” - 예수님께서는 자원하여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중요한 관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고 죽으신 일은 어쩔 수 없이 당하신 일도 아니며, 불행한 상황들 때문에 생겨난 우연한 결과는 더더욱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 열두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던 중에, 자신을 자유로이 하느님께 바치신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표현하셨습니다.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찬을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성부께 드리는 자발적인 봉헌의 기념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국 수난하고 돌아가시려고 사람이 되어 오신 것
예수님 스스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요한 12,2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 18,11) 이러한 말씀들에 힘입어 가톨릭교회교리서 607항은, “예수님 생애 전체는 성부의 구원하시는 사랑의 계획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원의로 가득 차 있다”고 하면서, “속량을 위한 수난이 당신 강생의 이유이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결국 우리를 위해 수난하고 돌아가시기 위해 강생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수난하신 예수님
가톨릭교회교리서 616항은, “이 끝없는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속량적, 배상적, 속죄적 그리고 보상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생명을 제물로 바치실 때 우리 모두를 인식하고 사랑하셨다.”고 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 아들의 신적 위격은 모든 사람들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들을 품으며, 그리스도를 온 인류의 머리가 되게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희생은 모든 사람을 위한 제사가 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봉헌하는 매일의 미사는 세상만민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기념하고 재현하는 것이고, 또 새롭게 현재화하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611항이 말하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봉헌에 사도들도 포함시키시고, 그들에게 이를 계속할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도들을 새로운 계약의 사제로 세우신 것이고, 오늘날 그 사도들의 후계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희생제사를 계속 봉헌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빈 무덤의 의미
병사들이 무덤을 지켰는데도 불구하고 수의가 잘 개켜져 있었다고 했고, 예수님의 시체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결국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 예수님께서 새로운 몸을 지니셨음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양식의 영적인 몸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당신께서 인간으로 사신 지상 생활을 마감했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신성을 지닌 하느님이셨기 때문에, 그분의 육신은 다른 시체들처럼 썩어 없어질 육신이 아니었습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를 “하느님의 힘이 그리스도의 육신을 부패하지 않게 하셨다.”(627항)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빈 무덤은 육신의 부패 없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내는 증거이자 표징이 됩니다. 곧 그리스도의 빈 무덤은 그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빈 무덤은 우리에게 우리의 희망을 이 세상에 두지 말라는 하느님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의 희망을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 곧 하늘나라, 하느님의 나라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 여러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바로 지금 이 자리의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러한 고통을 겪으시기도 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 당하셨음을,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죄를 지으면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마귀들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악습과 죄를 즐김으로써 마귀들과 함께 주님을 못 박았으며, 지금도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라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입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6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성당 주임, 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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