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21)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38) - 개혁의 왕, 요시야
우상숭배한 백성 용서 청하고 대대적 전례개혁
■ 3대 성왕
요시야는 남왕국 유다 땅을 다스렸던 역대 왕들 가운데 3대 성왕(聖王)에 꼽힌다. 이는 역사를 꿰뚫어 통치의 지혜를 추출해 낸 현자들의 판단이다.
“다윗과 히즈키야와 요시야 말고는 모두가 잘못을 거듭 저질렀다. 과연 그들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법을 저버렸기에 유다 임금들이 사라지게 되었다”(집회 49,4).
요시야의 성덕이 얼마나 출중하였으면, 현자들은 미려한 찬사로 그를 추억하고 있으랴.
“요시야에 대한 기억은 / 향 제조사의 솜씨로 배합된 향과 같다. / 그것은 누구의 입에나 꿀처럼 달고 / 주연에서 연주되는 음악과 같다. / 그는 백성을 회개시켜 바르게 이끌었고 / 혐오스러운 악을 없앴다. / 그는 제 마음을 주님께 바르게 이끌었고 / 무도한 자들이 살던 시대에 경건함을 / 굳게 지켰다”(집회 49,1-3).
아스라한 ‘기억’이 ‘향’이나 ‘꿀’이나 ‘음악’에 견줄 수 있다면, 도대체 그 주인공의 생애는 어떠하였다는 얘기인가? 역사가들은 현자들의 저 예찬을 이렇게 거든다.
“요시야처럼 모세의 모든 율법에 따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께 돌아온 임금은, 그 앞에도 없었고 그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았다”(2열왕 23,25 2역대 34,2 참조).
사족이 필요없는 최고의 인물평이다. 한 생애를 살고 이런 비문(碑文)을 얻는다면 무엇이 아쉬우랴.
한마디로 요시야 왕은 이스라엘 역사 기록에서 ‘개혁’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그는 이 개혁에 온 열정을 쏟은 후, 이집트 왕 느코와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2역대 35,24 참조). 하느님께서 굳이 원치 않으신 싸움이었지만, 이를 알아채지 못했던 요시야 왕의 과도한 ‘열정’이 초래한 참변이었다.
■ 거침없는 개혁
요시야 왕은 히즈키야 왕의 증손자다. 그는 55년을 통치한 할아버지 므나쎄 왕과 2년을 통치한 아버지 아몬에 이어, 여덟 살에 임금이 되어 31년간 남왕국 유다를 다스렸다. 그는 통치 8년째 아직 어린 나이에 ‘다윗의 하느님’을 찾기 시작하였다. 다윗의 정통신앙을 본받아 오직 야훼 하느님을 향한 전폭적 의탁과 말씀에의 순명을 자신이 추구해야 할 최우선 가치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통치 12년째에 이르러, 산당과 아세라 목상과 조각 신상과 주조 신상들을 치우면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본격적으로 정화하기 시작하였다(2역대 34,3-7 참조).
이어서 통치 18년째에 그는 그 마무리로 성전 보수 공사에 착수한다. 그 과정에서 대사제 힐키야는 야훼의 성전에서 헌금을 꺼내다가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서’를 발견한다(2역대 34,14 참조). 이 사실은 곧바로 요시야 왕에게 보고되고 그 율법서는 그의 면전에서 낭독된다. 요시야는 그 율법의 말씀을 듣고 자기 옷을 찢는다(2역대 34,19 참조). 왜 그랬을까? 그 율법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서슬 퍼렇게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주위에 있는 민족들의 신들 가운데 그 어떤 신도 따라가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 계시는 주 너희 하느님은 질투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주 너희 하느님의 진노가 너희를 거슬러 타올라, 너희를 저 땅에서 멸망시키시는 일이 없게 하여라”(신명 6,14-15).
요시야 왕은 인편을 통해 자신의 이 예단이 맞는지를 여예언자 훌다에게 묻게 한다. 돌아온 답변은 과연 예상대로였다.
“이제 내가 이곳과 이곳 주민들에게 재앙을 내리겠다. 그들이 나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향을 피워, 자기들 손으로 저지른 그 모든 짓으로 나의 화를 돋우었기 때문이다”(2열왕 22,16-17).
하지만 요시야 자신에게는 보너스 말씀이 주어진다. 말씀 앞에 겸손한 태도를 보인 자신에게는 일말의 자비가 주어져 이 일이 자신의 대(代)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불행 중 다행! 요시야 왕은 감읍하여 개혁에 박차를 가한다. 우선 백성들을 모아놓고 일종의 계약 갱신식을 성대하게 치른다(2열왕 23,2-3 참조). 이어서 곧바로 산당 및 우상 소탕이 대대적으로 이뤄진다. 그리하여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사람들은 그들 선조들의 하느님을 더 이상 배신하지 않게 된다(2역대 34,33 참조).
나아가 요시야 왕은 ‘계약의 법전’에 기록된 절기를 꼬박 챙겨서 지키는 전례개혁을 단행한다(2열왕 23,22-23 참조). 그 대표격이 ‘파스카(과월절) 축제’다. 그는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에서 최초로 야훼를 기려 과월절 축제를 지키도록 하였다.
■ 한 순간의 기도
바로 앞에서 요시야 왕이 율법서 낭독을 듣고 옷을 찢은 대목을 스치듯 지나쳤다. 다시 그 지점으로 돌아가 보자. 옷을 찢은 것은 분명 기도였다. 백성을 위한 통회와 탄원! 이는 절망의 바닥에서 외쳐진 미련의 절규였다. 그 절망이 얼마나 컸을지는, 동시대의 예언자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이 간접적으로 일러준다.
“이제 내가 그들에게 벗어날 수 없는 재앙을 내리리니, 그들이 나에게 울부짖어도 그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은 자신들이 향을 피우는 신들에게 가서 울부짖겠지만, 그 신들이 재앙의 때에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없을 것이다. 유다야, 너희 신들이 너희 성읍만큼이나 많고 너희가 우상을 위해 세운 제단, 곧 바알에게 향을 피우려고 세운 제단이 예루살렘 골목만큼이나 많구나!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마라. 그들을 위하여 탄원도 기도도 올리지 마라. 그들이 재앙의 때에 나에게 부르짖어도 나는 듣지 않으리라”(예레 11,11-14).
이 말씀을 요시야 왕이 듣지 못했다면, 이는 직무유기다. 몰랐을 리 없는 그는 무슨 기도라도 바쳐야 했다. 그 한순간 그가 바쳤을 기도 소리! 그 편린들은 여전히 남아 우리들의 기도가 된다.
전언(傳言)으로만 듣고,
사무치게 흠모해왔던
두루마리의 그 말씀,
낭독으로 들으매 이 어인 충격인가!
피가 역류하는 공황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무릎은 수직 강하 절로 굽혀지네.
어이하리
어이하리
‘축복’이 거꾸러져 ‘재앙’이 되었구나.
내 아버지 아몬의 2년,
아버지의 아버지 므나쎄의 55년,
그간의 구역질나는 우상놀이와 패륜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히즈키야 대왕(大王)의
태산같은 공덕을 모래성처럼 허물어버렸구나.
고을마다 굿당,
거리마다 우상,
행색마다 변절자의 꼬라지니,
어찌 피할 수 있으리
어찌 면할 수 있으리,
코앞에 닥친
목숨들의 파국과 내 나라의 수모!
아이고 아이고,
엉엉,
흑흑,
어떻게 울어야 그 노여움을 돌릴 수 있사오리?
묻사오니 답하소서,
히즈키야의 하느님, 다윗의 하느님.
아아, 제가 가슴을 찢사오니
하늘을 찢으시고 유예의 은혜를 베푸소서.
아이고 아이고
히즈키야의 하느님
다윗의 하느니-임.
천만다행으로 응답이 내렸다.
“내가 이곳과 이곳 주민들에게 내릴 모든 재앙을 네 눈으로 보지 않게 될 것이다”(2역대 34,28).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6월 14일, 차동엽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