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천주(=하느님)에 대하여 (1)
2015-06-26.
0. 지난 주간까지는 여러분에 교회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말을 시작하면, 이제부터 본론(本論)을 시작하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하느님의 일에 서론이거나 본론이거나를 구별하는 일은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서론이라고 생각해서, 이제부터 본론이라고 알아듣는다면, 듣겠다는 자세가 달라질까요? 어쨌든 대하는 입장에 따라서, 서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들 가운데서도 중요하게 알아들을 이야기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또 반복해서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1. 오늘은 서론(!!)의 시간을 마치고, 요즘 사용하는 말로는 하느님에 관해서 말로 설명하는 시간입니다. 한자로 표현된 것을 알아듣기 힘들어서 그런 것일까요, 예전에는 이 같은 내용을 천주(天主)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이나 저 말이나 모두 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시리는 하느님,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시고 인간이 그에 따르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을 가리키는 말인 것에는 달라진 것이 없지만, 시대에 따라서 말 표현이 달라졌습니다.
2. 천주(天主)라고 표현된 말을 사전에서 찾으면, ‘하느님’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라고 표현된 말을 찾으면 무어라고 설명할까요? 우리말 사전에는 꽤나 길게 나옵니다. 사전에 나오는 표현은 두 가지인데, <⦗종교언어⦘ ①종교적 신앙의 대상. 인간을 초월한 절대자로서 우주를 창조하고 주재하며, 불가사의한 능력으로써 선악을 판단하고 화복(禍福)을 내린다고 하는 신(神). 상제(上帝). 상천(上天). 천제(天帝)라고도 함. ②가톨릭에서 믿는 유일신(唯一神). 천지를 만든 창조주로서 전지전능(全知全能)하고 영원하며, 우주와 만물을 섭리로써 다스림, 성부(聖父), 신(神), 천주(天主)라고도 함>. 이렇게 설명합니다.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3. 헌데, 한자를 쓰면 왠지 멀리 있는 느낌이고, 하느님이라고 우리말로 표현된 것을 들으면 좀 더 가까운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감(語感)에서는 그렇게 달리 말할 수 있지만, 사실은 별로 차이는 없다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글자가 달라지니 우리가 느끼거나 갖는 감정이 달라지는 것뿐입니다.
4.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하느님, 즉 천주에 대한 것입니다. 훗날 여러분에게 이 하느님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나누어서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습니다만, 오늘 말씀드리는 얘기에서는 그렇게 나누어 말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시대가 흐르면서, 하느님께서 세상에 하신 일을 나누어 설명하려다보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이신 하느님이라고,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말하게 됐습니다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의미의 분화 다시 말해서 역할에 따라서 그 표현을 달리 쓰지 않고 하나로 쓰다 보니, 여러 문제가 생겼을 것이고, 사람의 판단에 따라 신앙이 갈라지거나 다른 것처럼 말하려는 경향이 생겼을 것입니다.
5. 요즘에 많이 사용하는 말로는 ‘하느님’이라고 해야 옳겠지만, 교리서대본에도 ‘천주’로 표시돼 있고, 우리의 신앙이름도 ‘천주교’라고 하니, 편의상 천주/천주님에 대한 설명으로 이 시간을 사용하겠습니다.
6. 이 ‘천주+님’을 우리 신앙에서 설명하는 내용이 ‘교리문답, 13번 항목부터 말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공경의 의미를 담아, ‘님’자를 덧붙이면 특별한 의미를 담는 설명이 될 거라고 여깁니다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지나치게 인간의 기준을 담아 설명하는 말이 될 수도 있고, 사실은 더 높이 공경하고 대우해야 할 ‘천주’에 대한 사정을 인간의 수준으로 낮추는 표현이 될 수도 있습니다.
7. 그래서 교리문답에서는 ‘천주’라는 표현 다음에, 요즘 세상에서 흔한 존칭의 표현인 ‘님’자를 붙이지 않고 생략한 표현을 씁니다. 물론 교리문답이 라틴어로 작성될 때부터 규정된 것은 아니고, 우리말로 번역한 좀 더 이른 시기에 살던 분들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거나 저거나 상관없고, 차이가 없다고 하고 싶지만, 글자가 다르면 뭔가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8. 천주에 대하여 사람들이 능동적(能動的,=남의 작용을 받지 않고 스스로 작용하는 것)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능동적이라는 표현을 쉽게 설명하면, ‘사람이 가졌다는 지혜와 지성 혹은 능력으로 연구하고, 그 연구의 결과로서 특정한 대상에 대해서 알아듣거나 알아낸 것을 표현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문답에 나오는 13항부터 21항까지 나오는 내용이 ‘능동적인 결과물’이냐는 것입니다. 정답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달리 표현하면 사람이 이렇게 표현한 것은 하느님께서 주도권(主導權)을 쥐시고, 인간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과 그 가운데서 사람이 알아들은 것을 글자로 표현한 것뿐이라는 얘기입니다. 지난 시간이나 그 전에 말씀드린 표현을 사용하면, 우리가 알아듣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시(啓示)해주신 것만 알아듣는다는 것입니다.
9. 천주/하느님은 어떤 분이시겠습니까? 13번의 문답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문답으로는 ‘천주’/하느님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설명합니다만, 그 내용을 우리가 이 글자의 표현이 의도하는 대로 정확하게 모두 알아듣는 것은 아닙니다. 천주는 신이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며, 그분은 선과 덕의 원천이신 신(神)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알아서, 누가 이 천주에 대해서 체험을 했기에 이렇게 표현한 것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리내용’은 우리 사람들이 알아듣거나 이해할 수 있는 내용만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교리와 신앙의 내용들 가운데는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내용도 있고, 우리의 지성과 지혜의 작동(作動)을 중지해야 하고, 수동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 사람이 거부할 수도 있지만, ‘믿음[信]’으로 받아들여야할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10. 천주/하느님을 가리켜,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말하면, ‘그것을 본 사람이 있나(?), 그것을 어떻게 믿으라고 내게 말하는가?’하고 묻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지금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창조주>이신 천주를 봤거나 체험한 사람이 있을까요? 당연히 없지요. 그런데도 우리 신앙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이 내용을 신앙의 믿을 교리의 내용으로 제시합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믿어서 받아들이거나, 믿지 않고 거부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11. 세상을 연구하는 과학에서는 <지구가 하느님의 힘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하지도 않지만>, 그 나이를 45억 년 전이나 50억 년 전의 아주 뜨거운 불덩어리에서 시작됐다거나 혹은 빅뱅(big bang,=①⦗천체⦘우주생성의 초기, 약 백 수십억 년 전에 일어난 대폭발《1948년에 제창되었으며, 우주는 그때부터 팽창하기 시작하였다고 함》. ② 대변혁.)의 시기부터 생겼다고 거창하게 말합니다. 그것을 본 사람도, 체험한 사람도, 기록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인데, 희한하게도 사람은 신앙에서 말하는 내용을 받아들이거나 믿기를 주저하면서, 과학에서 하는 얘기는 주저하는 일 없이 그냥 받아들입니다. 마치도 마른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말입니다. 이래도 좋을까요? 물론 사람의 자유이니까, 제가 뭐라고 한다고 해야 달라질 일은 없습니다. 왜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일들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죠?
12. 이 질문과 응답에서 ‘만물을 창조하신 신’이라는 설명의 앞에, ‘만선, 만덕’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선(善)과 덕(德)의 시작이요, 출발점이고, 종착점이라는 철학적인 표현입니다. 이 역시 사람이 능동적으로 안 문제도 아니고, 체험한 결과에 따른 표현도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유한한 존재가 세상을 대하면서 만날 수 있고, 실제로 만나는 모든 선과 덕은 하느님에게 그 연유(緣由,=무슨 일이 거기에서 비롯됨,)가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사람처럼 유한한 존재가 아닌, 생명이나 목숨의 끝이 있는 존재는 가질 수 없는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특정한 사람을 만나면, 악의도 없고 오로지 무조건 선한 면만 드러낼 사람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 사람에게 선과 덕의 출발점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드러내는 선과 덕의 출발점은 ‘세상에서 사멸(死滅)하는 육체’와는 다른 신(神)에게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일 것입니다.
13. 천주에 대한 두 번째 사항은 ‘존재의 시기’문제입니다. 즉 언제부터 하느님이 존재했느냐는 것입니다. 아주 현명한 질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질문에는 인간의 오만(傲慢,=건방지고 거만함)한 태도가 가득 담긴 질문입니다.
14. 사람이 영원(永遠,=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일/시간에 좌우되지 않는 존재)이라는 개념을 알까요? 저도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이 용어를 사용하여 뭔가 말을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또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낱말로 이렇게 규정하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이 ‘영원’이라는 표현을 설명하는 데에 ‘무시(無始,=<불교용어>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그 처음이 없음. 곧, 한없이 먼 과거.)’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제가 그 표현을 사용하여 기억하는 말 한마디는, 하느님에 대해서 ‘무시지시(無始之時,)’로부터 계신 분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어렸을 때는 뜻도 모르고 들었던 말이기도 했습니다. 이 한문자의 뜻은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계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사용하는 ‘영원’이라는 표현은 시작시간과 마침시간을 알 수 없는, 달리 말해서 그 시간에 구애(拘礙,=거리끼거나 얽매임)되지 않는 대상이라는 뜻인데, 사람의 체험이나 지식을 동원해서 설명한다고 해도 우리가 알거나 체험할 수 있는 일에 그런 것이 어디에 있으며 그런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런 대상이 천주님과 하느님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런 대상은 당연히 변(變)할 것도 없는 대상이겠지요?
15. 하느님이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인간의 지성이 작용하여 능동적으로 알아낸 사실도 아닙니다. 아무래도 하느님에 관한 것을 인간이 그런 방식으로 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기 때문입니다.
16. 다음 질문과 응답은 ‘하느님의 지식’에 대한 문제입니다. 먼저 읽지요.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표현이겠습니까? 사람이 자기 자신과 연결된 것조차도 제대로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하물며 하느님은 얼마나 아시는지를 묻습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인간이 아는 지식이라는 것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기껏 안다고 말을 해야 그것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시고, 하느님의 뜻이 인간에게 실현되는 것만큼만 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17. 지식은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저 안다는 것이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알았다고 말하는 것이 삶으로 드러나지 않고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쓸데도 없는 일입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도 그 내용이나 분량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과학에서 흔히 말하는 방법으로 설명하면, 사람들 각자에게 있는 뇌의 능력이나 용량은 무궁무진하다고 말할 수 있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 뇌가 가졌다는 능력의 3%만 기껏 쓸 뿐이고, 나머지 97%의 능력은 그냥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쓴다고 하면서도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에 아쉬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물론 아쉬움을 느낀다고 할 때, 그것을 무엇으로 보충할 수 있는지 그건 저도 아직 모릅니다. 그렇게 누구나 비슷하게 사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고, 에너지법칙(E=MC*2)을 찾아낸 아인슈타인은 인간의 뇌가 가졌다는 능력의 10%를 쓴 것이라고 합니다만, 누가 무슨 기준에 의해서 그것을 계산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그런 소리를 들었을 뿐입니다. 그런 입장에 처한 사람이, 하느님은 얼마나 아시는지를 질문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교회의 대답은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 사람이 제 아무리 숨기려고 한 것까지도 모두 아신다(!!)’고 선언합니다. 이것도 사람의 지식을 동원해서 알아낸 것은 아닐 것입니다.
18. 다음 문답의 내용은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아는 말로 묻지 않고, 옛날표현으로 돼 있습니다.
우리말 사전에 나오는 ‘무량’이라는 낱말의 뜻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음.무한량.’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느냐는 질문’을 반대로 뒤집으면 ‘계시지 않는 곳이 있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인간의 의지가 담겨 있는 문답입니다. 당연히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을 기준으로 말하기 때문에, 사람이 같은 순간에 둘 이상의 장소에 동시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하느님도 그러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사람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의 제1원인, 제1원동자이신 분이 장소에 구애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그 내용을 가리켜, 아니 계신데 없이 어디에나 계신다는 것입니다. 삶의 결과가 선한 장소, 악한 장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만, 하느님은 죽음의 세계에도 계신다는 우스개표현이 있습니다. 말하기 쉬운 소리로 이렇게는 표현합니다만, 이렇게 표현해서 우리에게 득(得)이 되는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19. 다음은 ‘하느님의 정의’에 관한 것입니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교리문답에서 말하는 내용부터 함께 읽지요.
제가 17번의 문답항목에 대하여 ‘정의’라는 표현을 썼습니다만, 17번에 나오는 항목은 정의대신 공의라고 나옵니다. 글자가 다르지요? 그렇다면 뜻도 다를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 어떻게 다른지는 저도 사전을 찾아보고, 이 말은 어떤 뜻으로 쓰는 표현이구나 하는 것을 잘 익혀야합니다. 공의는 인간이 표현하는 하느님의 속성을 설명할 때 쓰는 말이지만, 정의라는 말은 세상에서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거나 그런 내용을 가리키는데 쓰는 말입니다. 우리말사전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공의(公儀)는 ‘① 공정한 도의/ ②⦗가⦘선악을 공평하게 제재(制裁)하는 하느님의 적극적인 품성’이라고 나오고, 정의는 두 가지 의미로, (正意):명사】올바른 마음. 또는 바른 뜻이라는 것 하나와, (正義)[명사]①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이 하느님의 공의는 훗날에 나올 ‘상선벌악’을 시행하는 분으로 가리키는 표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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