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29)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46) - 별종 권력가, 느헤미야
항상 주님 뜻 물으며 기도하는 삶 실천
■ 방치된 세월 70년
즈루빠벨 성전이 지어진 지 70년 가까이 흘렀다. 그 사이 예루살렘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실망스럽게도 성전만 번듯하게 세웠을 뿐, 전례 및 신앙생활은 이전의 흐트러짐 그대로였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는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허물어진 성벽 안에서가 아니라 성 밖의 마을에서 살았다. 생계 때문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와 기도 문화가 활성화되기는커녕 지지부진에 빠지니, 예루살렘 시가지의 공동화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예루살렘의 르네상스를 위하여 누구 하나 사명감을 갖고 나설 수도 없는 형국이었다. 당시 유다 땅이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권 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 느헤미야 총독 활약 일지
이때에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난 인물이 느헤미야다. 그의 활약 전모에 대한 기록 ‘느헤미야서’는, 그 자신이 총독으로 부임하게 된 경위 및 총독직 수행 과정을 직접 기록한 수기(手記)다. 그의 자술을 따라 그 시대의 증언에 귀 기울여 보자.
키루스 칙령에 의해 바빌론 포로들의 귀환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여전히 바빌론에 남아 당시 바빌론을 통치하던 페르시아 제국에 신하로 등용된 이들이 있었다. 느헤미야는 그들 중 하나였다. 직책은 왕의 헌작 시종! 식사 때 곁에서 술을 따르면서 말 시중을 드는 직책이었으니, 왕의 측근 중 측근이었다.
어느 날 느헤미야는 유다에서 온 자신의 동생으로부터 예루살렘 소식을 듣는다. “포로살이를 모면하고 그 지방에 남은 이들은 큰 불행과 수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지고 성문들은 불에 탔습니다”(느헤 1,3).
즈루빠벨 성전 건축 때 미처 복구하지 못한 폐허의 참상 목격담에 느헤미야는 극심한 충격에 빠진다. 그는 땅에 주저앉아 슬피 울며 하느님께 여러 날 단식하며 기도를 올린다(느헤 1,4 참조). 대단한 신심이다. 세상의 어느 누가 약 140년 전 파국(정확히 587년)의 잔해를 놓고 저런 눈물을 흘릴 수 있단 말인가. 이 격한 슬픔의 기도 중에 그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던 듯하다.
“네가 가라, 예루살렘!”
느헤미야는 이 사명에 흔쾌히 자원하는 기도를 올리고 하느님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의 윤허를 받아내도록 도와주실 것을 소청한다. 느헤미야는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므로, 자초지종을 아뢰자 왕으로부터 예루살렘 성벽 수축을 총괄하는 총독직을 임명받는다(느헤 2,1-8 참조).
정치적으로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전권을 위임받고 귀국길에 오른 느헤미야. 역사가들은 느헤미야가 늦어도 기원전 440년에는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것이라고 본다. 새 총독으로서 그는 곧장 시급한 일에 착수했다.
그 과정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호른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관료 토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소식을 듣고 방해공작을 폈다. 그들은 통치의 틈새를 이용하여 세도를 부리거나 페르샤 통치권과 인맥이 닿아 있는 관료들이거나 했다. 그들은 온갖 모략, 무력 침공 시도, 공갈 등을 동원하여 성벽 수축을 훼방하였다. 그러나 물러설 느헤미야가 아니었다. 그의 추진력은 대쪽 같았다. “예루살렘에는 당신들에게 돌아갈 몫도 권리도 연고도 없소”(느헤 1,20).
합세한 청년들과 백성들은 성벽 수축과 성벽 방어를 밤낮으로 번갈아가며 감내해야 하는 이중고를 치렀다(느헤 4,10-17 참조).
52일 만에(느헤 6,15 참조) 어느 정도 성벽이 세워졌다. 그의 공적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최고 권력을 위임받은 공직자로서 그가 보여준 봉직 정신은 경이스럽기까지 하다.
무엇보다도 당시 민생고의 주범이었던 고리대금업을 금지, 기존에 받은 이자까지 되돌려주도록 강경 조치를 취한다(느헤 5,10-11 참조).
또한 그는 12년 총독 재임 기간 내내 자신 및 일가 모두 녹을 받지 않는 봉헌심으로 일한다(느헤 5,14-16 참조).
나아가 그는 유다 총독으로서 율법의 규정과 법규를 따라 최대의 공정심으로 비리와 특권을 철저히 척결하는 데에도 단호한 조치를 취하면서, 성전 종사자들의 업무 분장을 완료하였다(느헤 13,4-13 참조).
그리고 그는 유다의 안식일 문화를 율법 규정대로 정착시키는 데에 정치력을 행사하였다. 안식일 날 노동, 상행위, 거래 일체가 불가능하도록 일벌백계로 다스리면서 성문을 시간에 맞춰 통제하였다(느헤 13,15-22 참조).
끝으로 그는 통혼자들의 정리에도 결단력 있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민족 여자들과 자녀들이 그 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강경정책을 펼쳤던 것이다(느헤 13,25.28 참조). “이스라엘 임금 솔로몬이 죄를 지은 것도 바로 그런 여자들 때문이 아니오?”(느헤 13,26) 이 변증은 실패의 역사 속에서 그가 통찰한 불멸의 진리였다.
■ 한 문장 결어
진면목은 구체성에서 드러난다. 그러기에 그의 수기를 건(件)의 누락 없이 요약해 봤다. 이로써 느헤미야의 초상이 어렴풋이 그려졌을 것을 기대한다. 그런데, 그의 기록에서 특히 우리의 이목을 끄는 한 문장이 있다. 바로 결어다.
“저의 하느님, 저를 좋게 기억해 주십시오”(느헤 13,31).
사실 이 기도는 그의 기록 후렴에 해당한다. 그는 중요한 사건 기술을 마무리할 때마다 이와 비슷하게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바치고 있다.
“저의 하느님, 제가 이 백성을 위하여 한 모든 일을 좋게 기억해 주십시오”(느헤 5,19).
여기에는 ‘원수’ 갚는 일의 의탁도 포함되어 있다.
“저의 하느님, 이런 짓을 저지른 토비야와 산발랏을 기억하십시오”(느헤 6,14).
결어 직전의 기도는 그의 핵심 치적에 관한 것이다.
“저의 하느님, 이 일을 한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제 하느님의 집과 그분 섬기는 일을 위하여 제가 한 이 덕행을 지워버리지 말아 주십시오”(느헤 13,14).
이처럼 반복된 기도는 결국 무엇을 말해 주는가? 그는 매사에 하느님 현존을 의식하면서 하느님 뜻을 물으며 행했던 것이다. 그의 기도를 응용하여 우리의 소소한 마음씀을 미주알고주알 아뢰면, 우리의 기도가 더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나의 하느님!
점심때 친구들에게 커피 한 잔 쐈습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전철 안에서 어르신께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길에서 걸인에게 지폐 한 장 건네주었습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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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느님!
직장 상사로부터 억울한 욕을 바가지로 먹었습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터무니없는 질시와 모함으로 염장이 찔렸습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큰맘 먹고 구입한 물건이 반품불가 불량품이었습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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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느님!
성당 사정이 딱하여 결혼반지를 바쳤습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굶는 이들 생각하며 허기를 꾸욱 참고 한 끼 희생했습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삼 년을 공들여 한 영혼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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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8월 16일, 차동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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