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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5년 예비자교리13-구세주의 강생
작성자이철희 쪽지 캡슐 작성일2015-08-21 조회수3,478 추천수0

13. (1.7.1) 구세주(救世主)의 강생

2015-0821. 이태원

1. 지난 (달이 되기는 했습니다만,) 오늘 이 시간이 되기까지 여러분에게 우리 천주교회의 기본적인 사항과 세상의 삶에 대한 얘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죄가 무엇이고, 그 죄가 사람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영향을 남기는지 알게 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죄와 살고 싶다고 하지 않겠지만, 죄는 이러저러하게 교묘한 방법으로 사람과 함께 하는 기술(!!!)을 익히고, 그 사람을 구워삶아서(!!) 사람에게서 떨어져나가지 않고 죽을 때까지 함께 하는 것을 그의 사명으로 한다는 내용과, 사람의 삶에 함께 하게 된 죄, 최초의 인류에게 찾아온 죄, 지금의 인류에게도 끝까지 남아있는 죄, 원죄(原罪)에 대한 얘기까지 말씀드렸습니다.


2. 무더운 한 여름을 지내면서 휴가라는 시간을 생각하다보니, 두 번의 금요일 시간을 건너뛰었습니다만, 신앙을 사람의 말로 설명하고 싶은 내용은 많고, 이러저러한 일로 시간을 자꾸 빼다보니, 마음만 급하게 됐습니다.


3. 오늘부터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내용은, 지난 시간까지 말씀드렸던 죄()를 이기고, 인간이 다시 하느님 앞에 떳떳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설 수 있는 삶의 방법을 알려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탄생/강림에 대한 내용입니다. 제가 예수그리스도라고 편하게 말을 시작합니다만, 저 역시도 그분을 제 눈으로 본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삶에서는 인간이 보고 듣거나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만지고 오감(五感,=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의 차원을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신앙세계에는 그렇게 눈으로 확인하는 일을 포함한 오감(五感)에 관한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내용이 없다는 것을 먼저 강조합니다. 신앙세계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세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같은 대상을 생각하더라도 세상에서 바라보는 모습과 신앙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우리 그리스도교신앙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이 시간에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짧은 몇 마디 말로 할 수는 없습니다. 일부러 신비감을 주기위해서 그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삶에서 최대한 성실을 기울여 뭔가를 해설하고 해석하겠다고 하겠지만, 그 일에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이 가진 지성의 한계가 있으니, 그 지성만으로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나, 신앙에 관련된 것을 완벽하게 해설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그대로 뒤집으면, 사람으로 살면서 내가 접하거나 만나는 것의 진짜 의미는 이것이고, ‘이것 이외에 다른 내용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대단히 큰 오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 사람의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처음에 교리를 하면서 말했던 내용 가운데, ‘하느님에 관한 것은 하느님께서 직접 보여주시는 만큼만 알아듣는다는 계시(啓示)가 새삼스레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5. 사람의 삶에 돈은 중요한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세계에도 그러할까요? 사람의 세상에 시간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봅니다. 돈만큼 가치를 말하거나 돈보다 더 가치가 큰 것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세상에도 그럴까요? 대답은 그럴 수도 있다/아닐 수도 있다는 두 가지 선택 중에서 한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6. 우리 신앙에서는 돈에 대한 자세와 마찬가지로 시간에 대한 자세에서도 세상에서 바라보는 모습과는 다릅니다. 거창한 학문적인 근거를 갖고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신앙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행동방식이 사람이 하는 행동방식과 다르다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이 제가 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제가 의도하는 것과 다른 판단을 하고 산다면 그것도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다만 그 자유를 강조하면 신앙인의 한 사람, 그것도 충실한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 셈해지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7. 돈은 사람의 삶에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사람의 약속에 의해서 등장한 물질일 뿐입니다. 그 옛날에는 조개껍데기도 돈으로, 금이나 은붙이도 돈의 분량을 계산하는 방법으로, 요즘에는 종이나 동전에 그 금액에 해당하는 숫자를 써서 가치를 강조합니다. 앞으로도 시간의 변화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시간에 대한 것은 어떻겠습니까? 시간은 말 그대로 인간, 즉 사람의 세계를 애기하는데 중요한 것일 뿐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다른 이의 시간을 살 수는 없는 법이고, 돈이 필요하다고 그 시간을 남에게 팔수도 없는 일입니다. 인간에게는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시간이지만, 무시지시(無始之時, =그 끝을 알 수 없는 시작의 때)로부터 계신 하느님, 영원(永遠)한 존재라고 설명하는 하느님에게 인간이 계산하는 시간, 인간이 규정하는 시간은 의미가 없는 하찮은(!) 대상일 뿐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시간에 대해서 이렇게 대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시간을 중심으로 하는 눈에 보이는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이 시간에 대한 내용을 지금 말씀드리는 의도처럼 무조건 의미 없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중요성은 있다는 소리입니다. 그에 대한 것은 말씀드리지 않아도 여러분이 세상에서 현명하게 대하며 살 거라 믿겠습니다. 제가 굳이 설명할 이유는 없는 말 그대로 세상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8. 이제는 돈과 시간을 중요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세상에 들어오신 하느님의 일과 업적에 관한 내용을 말할 시간입니다. 세상에 들어오신 하느님을 우리 신앙에서는 인간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 하느님의 제2위인 성자, 세상에서는 마리아라는 여인을 통해서 태어난 사람이며 참 하느님이라는 다양한 표현으로 부릅니다. 우리가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어떤 말로 부르든지 그분이 하신 일과 업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이해만이 달라질 뿐입니다.

 

9. 인간의 세상에 들어오신 예수님, 다른 말로 하느님의 아들을 가리키는 전통적인 표현은 구세주(救世主)입니다. 구세주는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신 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 구세주라는 말은 일반명사가 아니라, 단일하고도 유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특별명사이고,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물론 우리가 다른 뜻을 특정한 대상을 말하고 싶을 때는, ‘구세주라는 말을 사용할 수는 있으나, 그때는 특별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50. () 구세주(救世主)는 누구시뇨?

() 구세주는 예수그리스도시니 천주 성자(聖子)로서 사람이 되신 자시니라.

51. () 예수그리스도라 함은 무슨 뜻이뇨?

() 예수라 함은 구세주란 뜻이요, 그리스도라 함은 성유(聖油)로 축성되신 임금과 대제관(大祭官)이란 뜻이니라.

10. 교리문답50번과 51번은 구세주에 대한 내용입니다.

항상 그렇듯이 질문에는 정답이 따라 나옵니다. 신앙교리를 말하는 이 시간에 질문을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여러분이 들은 그 질문은 우리의 생각을 알고 싶어서 신앙에서 하는 질문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세상을 구원한 구세주는 예수그리스도이고,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삼위일체교리내용에서 나왔을 제2위성자라는 신앙고백을 담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우리가 알아들을 말로 설명합니다

 

11. 예수는 구원자라는 뜻이요, 그리스도는 종교와 신앙에서 사용하는 표현으로 기름으로 축성된 임금이나 대제관을 가리킨다는 내용이 신앙교리의 내용에 있습니다. 대제관이라는 표현은 여러 제관(祭官)들 가운데 으뜸의 위치, 좀 더 강조하면 유일한 위치를 차지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기억한다면 그 뜻을 내가 알고 싶은 대로 알았으면서 나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다 알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그렇게 말하려면 신앙공동체에서 가르쳐 주는 대로 또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2. 신앙은 애석하게도 사람이 논리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만으로 구성돼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내 선택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신앙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해서 내 삶에 도움이 될 열매를 맺든지, 아니면 신앙에서 가르쳐주는 내용을 내가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내 맘대로의 길을 가고 그에 따른 결과를 만들든지 둘 중의 한가지입니다. 신앙의 길에는 중간은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삶에 충실한 사람들은 신앙의 일에도 세상의 일처럼 중간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신앙에는 그런 것이 왜 없느냐고 우기기도 하고, 자기 맘대로 중간을 만들고, 그 중간에 해당되는 삶을 드러내면서 자신은 하느님 앞에서 충실하게 살았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말 큰일 날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과연 어떤 사람이 그 말을 들려오는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까?


13. 앞에서 시간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만, 우리가 믿을 교리로 규정된 내용을 살피면, 그 안에는 예수님이 (지금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땅)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언제 태어나셨고 그분은 세상에서 몇 년을 살다가 이 세상의 삶을 마쳤는지에 대한 얘기는 없습니다. 그런 내용이 신앙교리에 중요한 사실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만일, 그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세상의 논리를 신앙의 세상에 적용하고 강요한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입니다. 신앙의 내용에는 그런 사항이 없지만, 인간의 사정을 받아들여 설명하면, 예수님이 탄생하신 때로부터 서기(西紀)년도를 계산한다는 것 정도는 말할 수 있습니다. 대단한 사실도 아니고 특별한 사실도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셈한다면, 올해의 년도를 계산하여 대략 언제쯤 이 특별한 일이 생겼는지를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올해는 <2015>이니까,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것은 그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역사연표를 과거와 달리 새로 계산한 요즘에는 그 시간보다 몇 년 더 오래전에 이 일이 이루어졌다는 소리도 합니다만, 그것이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52. () 천주 성자 어떻게 사람이 되시뇨?

() 천주 성자, 영혼과 육신을 취하사 동정녀마리아의 몸에서 나심으로 사람이 되시니라.

53. () 동정녀가 어떻게 예수를 낳으시뇨?

() 동정녀가 성신/성령의 전능으로 예수를 잉태하여 낳으시니 그 몸은 전과 같이 아이(=동정) 몸이니라.

14. 이 구원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신 것에 관한 내용이 52,53번입니다.

예수님은 현재 부르는 지명으로 하면, 이스라엘 땅, 베들레헴의 어느 동굴에서 태어나셨고, 거기에 있던 동물들의 구유(<명사>:마소의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 흔히 큰 나무토막이나 큰 돌을 길쭉하게 파내어 만듦.)에 그 몸이 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나라와 지명 그리고 태어났다고 하는 날짜에 대한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믿을 교리의 내용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시간에 그 내용을 자세하게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그곳에서 그분은 세상의 아버지는 요셉으로, 세상의 어머니는 마리아라는 여인을 통해서 태어난 분이시지만,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셨으며,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들의 반복하는 예언을 성취하신 분으로, 또 그네들 역사의 위대한 임금이었던 다윗임금의 후손으로, 히브리백성/이스라엘백성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신앙교리의 내용과 일반적인 내용을 섞어서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라는 이름도 그리스도라는 명칭도 일반명사일 수 있지만, 현재 우리 신앙에서는 그 두 가지 표현을 하나로 합쳐서, 특별한 분을 가리키는 특별명사로 생각하고, 세상에 유일한 분으로 말합니다

 

15. 하느님에게서 영이 내려오셨고, 부인으로서 남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어머니가 된 마리아가 혼자의 힘으로(=단성생식) 예수님을 낳았다는 것이 또한 신앙교리의 내용입니다. 여자 혼자의 힘으로 임신한다는 것은 세상의 논리에서는 전혀 가능하지 않은 일이고, 가능해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미물(微物)이라고 생각하는 지렁이와 박테리아는 단성생식을 합니다. 암수동체이거나 반이 갈라져서 새로운 생명체의 삶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16. 마리아에 대하여 우리가 신앙으로 고백하는 이러한 내용은 과학의 지식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을 가리켜 동정녀잉태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마리아는 아들을 낳고서도 여전히 동정녀(童貞女,=동정인 여자, 숫처녀)라고 불립니다. 이는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도 아니고, 사람의 지식으로 해석할 수도 없는 신앙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내용을 강조하는 것은 과학으로는 해설하지 못할 일을 신앙이니까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보다는, 사람의 상식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은 그 사람의 세상에 특별한 일을 하신다는 의미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사는 세상에 특별한 일을 하시고자 하시는데, 반드시 인간의 사전(事前)허락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17.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세상에 하시는데, 인간의 허락을 얻은 다음에 하실까요? 그래야만 하느님의 명성(名聲)이 유지될까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생각하는 논리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한계입니다.


18. 성자예수그리스도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신앙의 진리입니다. 요즘에 발달했다는 학문에 근거해서 여성(女性)학이나 부인(婦人)관련학문에서 성모님을 검사한 것도 아니고, 그럴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에서 말하는 동정성이라는 말을 좀 더 자세하게 살피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여러분처럼 신앙을 처음 만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성모님의 발현이나, 교회공동체에서 이렇게 말하는 내용들이 아직은 피부에 닿을 얘기는 아니지만, 몇 가지 강조하는 말을 인용하면, 성모님은 세상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발현에서 당신스스로를 가리켜서, ‘당신은 동정녀였다고 강조합니다

 

19. 우리말 사전에 나오는 동정녀라는 말의 뜻은 ‘(童貞女), 동정인 여자. 숫처녀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다시 동정이라는 말을 찾으면, ‘이성(異性)과 성적인 접촉이 없는 순결. 또는 그런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전부 다 조사하겠다고 덤빌 일도 아닙니다만, 세상에서 이렇게 말하는 의미를 신앙의 입장으로 해석하면, 하느님께서 세상에 창조하신 최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든가, 더럽다거나 오염됐다는 표현의 상대적인 의미로 깨끗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에 따라서 아직은 변형되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로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 있었던 여인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손길이 가장 처음으로 왔다는 신앙의 선언이 바로 동정에 대한 이론이요 표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과학적인 조사나 검사를 한 다음에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54. () 천주 성자 사람이 되신 후는 천주 아니시뇨?

() 천주 성자 강생하실 때에 천주성을 버리지 아니하셨으니 사람이 되신 후에도 천주시니라.

55. () 예수그리스도께 몇 가지 성()과 위()가 있느뇨?

() 예수그리스도께 성으로는 천주성과 인성(人性) 두 가지가 있고, 위로는 다만 천주 성자위 하나뿐이니라.

20. 마리아에 대해서 고백하는 동정성에 대한 얘기와 비슷한 것이 천주성자,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마리아의 동정성에 관한 것은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하는 우리 사람들이 온전하게, 또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같은 판단이나 과정이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일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세상에 사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을 무시하거나 사람이 가진 능력의 크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만, 사람은 하느님의 업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변하지 않을 사실이라면 우리가 이 하느님의 업적이나 일, 세상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분을 우리가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해석하고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21. 마리아에 대하여 신앙에서 고백하는 이러한 사정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고백하고 선언하는 신앙의 진리에도 연결됩니다. 사람은 자신이 세상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지식을 동원하여, 세상의 일을 설명하려고 합니다만 마음으로는 간절한 일이 얼마나 실현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신앙의 일들이나 신앙의 내용은 우리가 가졌다는 지식과 학문의 능력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고, 한계가 있는 일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입니다

 

22.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신 후, 그분이 하느님이셨는지 아니면 순수한 인간이었는지 묻는 것은 사람의 관심사항일 뿐입니다. 더더구나 그런 관심사항을 가질 사람은 하느님을 본래의 그대로, 인간의 세상에 특별한 구원을 드러내신 분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들이 드러내려고 하는 태도이니, 신앙의 길을 배우려고 이 자리에 나온 우리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희한한 태도입니다. 사람이면 사람이고, 하느님(=천주)이면 하느님(!)이지, 사람도 되고 하느님도 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고 묻고 싶겠지만, 그것 역시도 인간의 주장일 뿐입니다

 

23. 세상에 존재가 드러나는 상급단계의 모습으로는 천주성(天主性)과 인간성(人間性)을 말합니다. 천주성에 버금가게 인간성의 가치가 높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말로는 천주성을 말합니다만, 사실상 인간의 입이나 지식으로서 천주성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묘사할 방법은 없습니다. 기껏 할 수 있는 얘기란, 사람을 세상 사물의 가장 뛰어난 존재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이 뛰어난 존재가 된 것은 하느님의 모상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라는 원칙을 추정하여 역으로 적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에게 이토록 뛰어난 특징을 주신 하느님이야 말로 과연 어떤 분이겠는지 그 내용을 역()으로 적용하여 나온 소리라는 것입니다.(=유비성의 원칙??) 그런 뜻으로 우리가 천주성을 생각한다면 과연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이 교리의 몇 번째 시간에 언급했던 천주/하느님에 대한 속성(문답13~21)을 말씀드릴 때 했던 이야기들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하느님/천주에 대해서 뭔가 알았고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로 구별하고 내용을 정리할 줄 알았기에 하느님을 그렇게 묘사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지녔기에 하느님을 감히 인간의 언어로 묘사하겠습니까? 실제로는 인간이 뭔가를 한다고 해도, 그게 정말로 가능하고 합당해서 하는 일이거나 행동인지도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4. 천주성의 첫 번째 특징은 영원불멸성입니다. 당연히 인간성에게 적용되는 특징은 그 표현의 상대적인 의미의 유한성입니다. 끝이 없거나 그 끝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는 성질/성격과 기껏해야 80년에서 100년 혹은 120년 정도의 시간만이 허락된 인간성의 차이를 어떤 표현으로 설명하겠습니까?


25. 예수님은 하느님이셨기에 천주성을 말하고,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때로는 서글퍼하는 모습도 보이셨고, 고통을 마주대하면서는 하느님께 탄원의 기도도 하신 분으로서 인간성의 모습도 보이신 분입니다. 그리고 다시 천주성을 발휘하시어 부활하셨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승천의 모습도 이루신 분, 천주성을 드러내신 하느님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말로는 우리가 이렇게 표현합니다만,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무슨 능력이 있어서 하는 소리는 아닙니다.


26. 신학적인 논쟁의 하나이기에, 이 교리시간에 말할 내용이 아니기는 합니다만, 천주성과 인간성이 예수님안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실은 인간의 지성과 지혜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신앙의 내용이 더 앞서야 할 수도 있습니다. 간단하게 구별하여 말씀드린 시간에 대한 제약(制約)문제만 하더라도 천주성과 인간성은 조화를 이룰 수 없고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여깁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설명하려는 하느님의 모습이고 예수님에 대한 얘기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56. () 마리아 천주의 참 모친이시뇨?

() 인성(人性)으로 마리아께 나신 예수가 참천주이시니, 마리아는 천주의 참 모친이시니라.

57. () 성모 마리아 평생 동정녀시뇨?

() 성모 마리아는 종신토록 참 동정녀시니라.

58. () 성 요셉은 예수의 참 아버지시뇨?

() 성 요셉이 예수를 낳은 아버지는 아니요, 오직 성모의 참 정배(淨配)로서 예수를 보호하고 기르신 아버지시니라.

27. 다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게 된 과정에 직간접으로 도움을 주신 인간이었던 요셉과 마리아, 마리아와 요셉에 대한 내용입니다. 항목은 세 개로 구별돼 있습니다만,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것이 두 개, 아버지 요셉에 대한 것이 한 개로 돼 있습니다.


28. 우리 신앙에서 여성의 힘을 더 크게 본다고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신앙의 힘은 일반적으로 남자들보다는 여성들을 통해서 더 잘 전달됩니다. 적어도 이 교리시간을 통해서 여러분에 말씀드릴 때, 남자는 세상을 지배하는데 더 열을 올리고, 여자는 세상지배보다는 감수성을 발달시켜 신앙의 요소에 더 민감하고 정확하게 반응한다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섬세한 신앙에 대한 내용들에는 남자들의 역할보다 여자들의 역할이 더 크게 등장하는 모습을 보고서 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29. 예수님은 참으로 인간이기도 했고, 또한 하느님이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한 대상에게 적용되는 이 표현을 서로 바꾸어서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 마리아는 천주/하느님의 어머니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역시 인간의 지성이나 지혜로 알아낸 내용은 아닙니다

 

30.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한 얘기는 먼저 말씀드린 일이 있으니 이 자리에서 따로 또 강조하지는 않겠습니다. 동정녀라는 표현은 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지닐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배려하셨고, 실제로 그런 분으로 사신 성모님께 적용하는 교회의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31.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 아버지 요셉이 하신 직접적인 일은 없습니다. 누군가가 봤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신앙의 내용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분이라는 소리도 아닙니다. 흔히 하는 말로, 요셉성인은 예수님을 기르신 아버지/양부(養父)라는 표현을 써서, 예수님은 다윗을 조상으로 모시는 가계에서 태어난 분이라는 표현도 씁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일에서 인간의 위대한 조상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저 우리가 표현하고 구별하기 위한 방법일 것이고, 인간의 세상과 뭔가 연결하기 위한 표현일 뿐이라고 쉽게 알아들으면 될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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