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아카데미] 반대받는 표징
‘좌파’로 오해받는 사회교리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한국을 다녀가신 지 벌써 일 년이 지났나 싶은 요즘, 언론은 쿠바와 미국 방문 등 그분의 소식을 계속해서 전한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모습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시고 한결같으시다. 작은 차를 타고 이동하시고, 가장 낮고 가장 아픈 자리로 향하신다.
미국 의회에서 하신 연설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정치는 인간과 사회 공동선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시며, 경제적 기득권에 많은 영향을 받는 정치 현실을 염두에 두시고 “정치는 경제와 금융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이민자와 난민, 가난한 사람들의 존엄을 대변하시며 미국사회가 그들에게 폭넓은 관용를 베풀어야 한다고 촉구하셨다. 특히 노숙자들과의 만남 도중에는 “하느님의 아들도 노숙자로 세상에 오셨다. 집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며 가난한 이들을 옹호하고 대변하셨다.
마찬가지로 유엔 연설을 통해서도 환경을 파괴하는 행위는 인간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셨고, 국제 금융경제 질서가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소외로 몰아넣고 있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국제 사회의 관심과 연대를 촉구하셨다.
어느 인터뷰를 통해서 교황께서 “가톨릭 사회교리가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한 적은 없다고 확신한다”고 밝히셨듯이 이러한 말씀과 행동들은 인간의 존엄을 천명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교회의 사회교리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럼에도 소수의 기득권을 대변하는 미국의 극우방송과 극우성향의 정치인들은 교황이 정치에 개입하고 있다며, 또는 “좌파 교황”이라며 비난하고 있다. 다수는 아닐지라도 기득권을 대변하는 정치인들에게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며 그들의 존엄이 훼손당하는 현실을 고발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복음을 읽다보면 예수님도 그러한 처지에 내몰렸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했을 때, 여성 예언자 한나는 예수님이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 2, 34)이 될 것이라 예언했다. 예수님은 공생활 내내 정치와 종교, 경제 영역의 기득권자들의 미움을 받았으며, 실제로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을 어떤 식으로라도 죽일 음모(루카 22,1-2 요한 11,45-53)를 꾸몄다. 그리고 예수님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못하게 막았고, 백성을 선동했으며, 자신이 임금이라고 참칭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당했다. (루카 23, 1-5) 이미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 36)고 밝히셨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예수님을 오해하고, 예수님께 누명을 덮어씌운 것이다.
이러한 반대 받는 표징은 2000년 전 예수님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도 주어졌고, 지금 여기의 우리 사회 안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 하는 교회의 사명(사목헌장 4항),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천명’하고 ‘인간 존엄성이 침해받는 것을 고발’(간추린 사회교리, 107항)하는 사회교리의 사명이 종종 정치 개입이나 ‘좌파’라는 비난에 맞부딪히고 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러했고, 미국 극우 방송이 그러하듯, 자신들의 이해관계부터 따지는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인다. 두려워 말자.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고 불의를 고발하는 것은 교회 본연의 사명이 아닐 수 없다. 어떤 경우에 이런 선택이 반대 받는 표징으로 돌아오더라도 어쩔 수 없다. 모든 예언자들이 그랬고, 예수님이 그랬듯이. 그것이 교회의 길이기 때문이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과 신학대학 교수를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0월 25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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