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38)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55) - 낙원을 훔친, 우도(右盜)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간청에, 예수님 구원 선언
■ 기쁜 소식이다!
신약시대 인물들의 기도를 용광로처럼 달군 것은 복음체험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복음인가?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복음의 핵심을 굴절 없이 알아들을 필요를 새삼 느낀다.
예수님은 ‘복음선포’로써 당신 공생활을 시작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여기서 ‘복음’의 골자는 죄의 용서다. ‘하느님의 나라’는 다름이 아니라 이 죄의 용서가 실현된 나라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은 명백하게 선언하셨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이 말씀은 평범하게 들리지만 실상은 엄청난 파격을 함축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구원의 기준은 누가 뭐래도 상선벌악(賞善罰惡)이다. “착하게 살면 상 받아 천국을 누리게 되고 악하게 살면 벌 받아 지옥행이 된다”는 이 정식(定式)은 요지부동 지엄한 법칙이었다. 그러기에 누구고 구원을 받으려면 선의 지침인 율법을 충실히 지켜 ‘의인’으로 인정받아야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의인 천당, 죄인 지옥!”의 불변 정식을 뒤엎는 듯한 도발적 발언을 하신 것이다. 당연히 이는 유다 지도자들의 입장에서는 ‘큰일 날 소리’였을 터였고, ‘죄인’들의 입장에서는 허황되게 ‘뜬구름 잡는’ 주장으로 들렸을 터였다.
이쯤에서 물음이 하나 제기될 수밖에 없다.
“구약시대에도 ‘죄’를 벗기 위한 회개와 속죄의 제사라는 것이 엄연히 있었는데, 대관절 어떤 사람을 ‘죄인’으로 낙인찍어 구제불능의 사람으로 치부했는가?”
이에 대해 올바로 답변하려면, 먼저 율법준수와 관련된 전통의 형성과정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 본디 율법은 10계명이었다. 그 언저리에 여러 규정과 법규들이 추가되었다. 그 실행과정에서 세부조항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서는 613개 조항에 달했다. 이를 관장할 권한은 전적으로 율법 학자들(및 바리사이)에게 맡겨져 있었다. 이들은 율법의 적용, 해석, 그리고 교육에 대해 불가침의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 이 613개의 율법조항! 이들이 그물망처럼 촘촘히 엮여져 범부의 일상에 옭죄어 적용되면 ‘죄인’ 선고에서 빠져나갈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그랬다. 기득권적 신분과 생활 여건상 율법을 지키는 데 유리했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을 ‘의인’으로 자처하고, 그 밖의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기 일쑤였다. 이런 배경에서 예수님의 복음선포는 풀어 말하면 이런 의미였다.
“복음입니다! 이제 하느님은 죄인들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율법에서 탈락한 사람들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복음이 이렇게 요약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죄를 용서하는 전권이 ‘외아들’ 예수님께 위임된 사실을 수긍하고 믿기만 하면, 서로 별개의 것으로 느껴지는 앞의 두 문장들은 사실상 똑같은 내용의 말씀이 된다.
훗날 사도 바오로는 더 실제적인 문장으로 복음의 진수를 밝힌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무슨 법으로 그리되었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3-24.27-28).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용서받고 구원받는 길이 열렸다는데, 이 기쁜 소식에 견줄만한 희소식이 세상에 또 있을까. 없다!
■ 편애받은 사람들
앞에서 언급했듯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오셨음을 천명하셨다. 그러기에 예수님 복음선포의 첫 수신자는 율법 전통에 의해 이미 살아서 지옥행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끝장난 인생들이었다. 이들이 예수님 편애의 0순위 대상이었다.
그 대표격인 사람들이 바로 ‘땅의 백성’(암 하아레츠: 구약의 용어), 또는 ‘군중’(오클로스: 신약의 용어)들이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밑바닥 인생들이었다.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노골적인 편애를 우리는 “주님의 영이 나에게 내리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 참조)는 말씀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창녀와)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마태 11,19: 마르 2,16 참조)라는 말씀에서 확인한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시며 그들을 끼고 도셨다. 이러한 일방적 옹호는 율법 학자 및 바리사이들에게 날선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예수님)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루카 11,53)던 것이다.
■ 강도가 낙원을 훔쳤구나
복음의 결정적 핵심은 ‘공짜’ 용서다. 이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방식으로 에누리 없이 율법을 적용하던 전통의 관점에서 봤을 때, 하느님의 파격적인 자비의 조치였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이를 입증하는 과정이었다.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써 이 용서를 완성하셨다. 그 절정에 우도가 맞은 은총의 벼락이 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2)라는 간청 한마디에, 예수님은 엄청난 선언을 하셨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그는 살인강도였다.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는, 큰 죄인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그의 청원에는 “당신은 메시아입니다”라는 고백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 한마디에 예수님은 그를 즉각 구원하셨다. 이것이 복음의 진수다. 강도는 외마디 소청으로 복음 대박을 터트린 셈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횡재였으면 ‘황금 입’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탄복했을까. “드디어 이 강도가 낙원을 훔쳤구나!”
어쨌건, 십자가상에서 숨을 고르며 얼떨결에 바친 강도의 감사기도는 짧고 떨렸으리라.
낙원?
평생 강도 짓을 일삼은 이 파렴치한 죄인에게 낙원요?
어떤 책벌도 마땅할 판인데, 이 어인 은총의 벼락인가요.
‘낙원’!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당신 절규가 순수 희망의 외침으로 들리더니,
이젠 환청처럼 들려오는 소리 ‘낙원’!
겨자씨만한 믿음에, 천부당만부당한 횡재로군요.
낙원에 든다?!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외마디 소원에, 돌아온 약속 말씀 “함께 낙원에 든다”?!
찰나의 교감으로, 졸지에 낙원 영주권을 얻었네요.
낙원, 절대로 훔쳐질 수 없는 것을 훔쳤네.
낙원을 훔친자, 천상 강도였던 내게 새 이름이 생겼네.
낙원의 증거자, 역사 이래 가장 큰 강도, 대도(大盜)로서
나 천국에서 복음의 기쁨을 길이 증거하리라.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10월 25일, 차동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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