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개인의 죽음과 심판에 대하여
2015. 10. 30. 금요일.
1.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은 많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먹고사는 것, 건강, 돈, 친분관계를 먼저 떠올릴 수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지금 말씀드린 이런 것들은 살아있는 사람, 내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한에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들인데, 사람의 삶에는 이러한 요소들 외에 좀 더 극적인 것들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극적인 내용들은 여러분과 함께 이 예비신자교리에서 다루는 내용도 포함할 것입니다.
2. 아직 내 삶에 다가온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을 가리켜 사말(四末)이라고 표현하는 신앙의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말사전은 ‘사말’에 대해서, ‘두 손과 두 발의 끝’을 의미한다는 표현도 있지만, 그 첫 번째 표현은 이 신앙의 시간에 합당한 설명은 아닙니다. 이것보다는 ‘신앙의 용어’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면하지 못할 네 가지 종말’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종말을 ‘죽음, 심판, 천당, 지옥’이라고 분류합니다. 이 네 가지 끝[=말/末]살아있는 사람으로서 만나지 못할 것이니, 우리가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도 좋을까요?
3. 사람의 삶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포함하는 오감(五感)에 의한 것만으로 제한하면, 이 사말에 대한 것은 관심을 갖지 않을 일이 될 것입니다. 산 사람으로서 죽음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산 사람으로서 내 삶에 대한 판정의 결과를 알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에 대한 이론적인 대답은 가능할 수 있어도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고, 이 내용은 오감의 세상이 아닌 신앙의 세상에서 다루는 내용입니다. 또한 그렇게 산 삶의 결과에 따라 복을 받거나 행동의 대가를 받는 천국이나 그 반대의 경우인 지옥에 빠지게 된다는 이론은 오감을 중시하는 세상에서는 찾을 수도 없고, 말하지도 않는 것이며 형이상학(形而上學)적인 내용입니다.
4. 여러분과 함께 하는 이 시간은, 우리가 말로 표현하면서 내용을 다루기는 합니다만, 세상의 것만을 얘기하는 시간은 아닙니다. 신앙의 내용도 함께 다루는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감을 중시하는 세상에서 설명하고 싶은 사말과 신앙에서 설명하는 사말의 세상이 다르겠지요? 물론 한계는 있습니다. 제가 두 세상의 설명이 다를 것이라고 말은 했습니다만, 다르다고 하는 그 내용도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글자로 설명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안타깝지요? 하지만 달리 방법을 생각할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5. 신앙에서 말하는 ‘네 가지 특별한 일’도 사람의 삶에 특별한 영향을 줍니다. 물론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신앙에서도 그것을 설명하겠다는 생각으로 이 시간을 마련합니다만, 그 신앙의 세상을 처음부터 부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서라면 신앙의 설명은 다른 자세를 가진 사람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여러분은 신앙인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기에, 여러분을 상대로 하여 그 내용을 말씀드리겠다는 것이니, 현실에 삶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무엇인지 판단해서 함께 알아듣고, 현실의 삶을 좀 더 의미가 있게 다루는 일에 좋은 영향을 남길 수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6. 사말(四末)이라고 표현하는 네 가지 입장에서 처음 만나는 것은 죽음에 대한 것입니다. 교리문답95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신앙에서 말하는 죽음은 세상의 것과 그 설명이 다릅니다. 우리말 사전에 나오는 죽음이라는 표현은 ‘죽는 일.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오감의 세상에서 신앙의 세상을 완벽하게 설명할 방법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합니다만, 우리말사전에 나오는 표현만으로 여러분이 죽음에 대해서 확실하고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나요? 긍정이라면 다행이지만, 부정이거나 대답의 내용이 부족하다면, 그 나머지 내용을 우리가 어디에서 채우겠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거나, 신앙인이라고 하면서도 ‘세상의 기준에만 맞춰 사는 사람’들이 보일 수도 있는 안타까움은 매우 클 것입니다.
7.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이라는 표현으로 죽음을 설명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했습니다만, 신앙에서는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영혼과 육신의 갈림’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을 반대의 입장에서 해석한다면, 사람이 태어나고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라는 표현이 될 것입니다.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 됐든지 분리가 됐든지, 두 가지 모두 다 사람이 눈으로써 그 현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설명이 그러한 것뿐입니다.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의 몸을 육신이라고 한다면, 세상에서는 말하지 않을 법한 것이 또한 영혼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영혼이라는 표현도 신앙의 용어이지만, 비슷한 세상의 표현으로 ‘정신/마음’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혼(魂)’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만, 이 혼이라는 표현은 신앙에서 말하는 ‘영혼’과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용어는 세상의 사정만 그 뜻으로 담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8. 사람이라는 존재를 ‘하느님의 힘과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영혼’과 세상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 육신의 결합으로 신앙은 설명합니다. 그렇게 결합되어 60년 혹은 80년 혹은 100년쯤 세상에서 살다가 육신(=세포)의 힘이 다하면, 다시 갈라지는 순간을 거치는 것을 신앙에서는 죽음이라고 설명합니다.
9. 다음은 죽음과 관련된 신앙의 요소들을 좀 더 말하는 내용입니다.
세상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숨도 쉬지 않고, 맥박도 정지한 육신을 우리는 ‘죽은 몸(!)’이라고 표현하고, 땅에 묻거나 화장(火葬)의 절차를 진행합니다. 세상에서 그 흔적을 지우거나 치우는 순서일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일을 나쁘다고 말할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 살았던 누구에게나 이 일은 예정돼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같은 일이겠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시간의 순서일 것입니다. 세상에 먼저 태어나 먼저 살기 시작했다고 해서 그 일을 먼저 겪는 것도 아니고, 늦게 태어났다고 해서 세상에서 오랫동안 사는 것도 아닙니다.
10. 사람으로서 삶의 시작을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라고 했으니, 그렇게 시작된 일이 ‘영혼과 육신의 분리’라고도 하는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사람이 세상의 삶을 마치면, 홀로 남게 되는 영혼에 관한 문제입니다. 신앙과 교리에서 이렇게 말하더라도 그 영혼이 홀로 남은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도 본 일은 없습니다. 이것은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와 이론’의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사용하는 용어인 혼(魂)을 오감(五感)으로 보거나 느꼈거나 체험한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신앙에서는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영혼과 육신이 갈라지면, 육신은 사람들이 대하는 방법에 따라 예우(禮遇)를 겸한 길로 가고, 영혼은 육신과 함께 있던 때의 삶의 결과를 심판을 통하여 하느님에게서 상이나 벌을 받는다는 것이 교리문답96번의 내용이고 신앙의 설명입니다. 반복합니다만, 영혼이 홀로 남고, 그 영혼은 육신과 세상에서 함께 했던 일의 결과에 따라 심판을 받고 상이나 벌을 받는다는 설명은 세상에서 우리가 가졌다는 오감의 감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11.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이 말은 제가 그 모습을 알거나 보았다고 말할 수 있기에 하는 소리는 아닙니다. 신앙의 해석이고 설명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서 ‘죽는다’는 말과 그 표현을 사용할 때, 우리가 담는 의미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있던 것이 사라지고 없어진다는 얘기이고, 철학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질료(質料)’라고 하는 것이 더 이상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그 존재(存在)의 끝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사전에 나오는 질료라는 낱말은 ‘형식을 갖춤으로써 비로소 일정한 것으로 되는 재료<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형상(形像)과 함께 존재의 근본원리라고 생각함>’로 설명합니다.
12.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순서가 바뀌기는 했습니다만, 사람의 한 부분을 이루었던 육신이 영혼과 갈라진 다음에 가는 과정을 교리문답97번에서 설명합니다. 사람의 몸에서 영혼이 갈라지는 일을 통해서 죽음의 과정에 도달하면, 육신이 가야할 길은 ‘썩는 일’만 남았다고 표현합니다. 그 일은 그 몸이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하는 입장은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시대이전인 옛날에는 ‘화장(火葬)’이라는 장례방법을 교회공동체서 거부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요즘과 같은 교회의 해석이 생기기 전에, 일부의 사람들이었겠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훗날 허락하실 육신의 부활을 믿지 않고 신앙을 거부한다는 뜻으로, 영혼이 떠난 육신에 대한 뒤처리로 화장을 선택한 때가 있었습니다. 신앙을 거부하겠다는 자세가 앞선 행동이었으니, 교회공동체와 그리스도교신앙에서는 올바른 방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해석하지는 않습니다.
13. 영혼이 떠나간 육신을 매장할 때, 미라(Mirra/포르투칼어)로 남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자연의 조화와 환경에 따른 것이지 신앙에서 육신을 해석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14. 영혼과 육신의 갈라짐이라고 말하는 이 ‘죽음’이라는 순간을 맞이하기 전 신앙에서 권고하는 내용이 교리문답98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방법을 생각하고, 그에 따라서 사는 것만 해도 힘겨운데, 죽음에 대한 걱정(!!)까지 미리부터 해야 하느냐고 오감을 중시하는 세상의 입장에서 질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선택은 우리의 자유입니다. 신앙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런 걱정을 하면 무엇이 달라질 수 있는지 대답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하는 걱정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선택하는 대로 삶의 결실을 맺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이 닿을 수 있는 일이 있고, 그 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세상과 오감을 중시하는 세상으로 나누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죽음이후에 대한 것은 오감의 문제로 설명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얘기입니다. 상상입니다만, 감각을 중심으로 하는 세상에 머무는 어떤 사람이 신앙의 세상에 머무는 사람을 향하여, 내가 그 내용에 대해서 더 자세하고 알고 싶으니 설명해달라고해도 속이 시원한 해설을 해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감각을 넘는 세상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15. 신앙의 세상에서는 ‘죽음을 미리 생각해보도록 권고’합니다. 이렇게 하라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사람의 삶은 죽음으로 만사(萬事)가 끝난다는 세상의 해석이나 입장을 경계하자는 것입니다. 육신과 영혼의 갈림이라고 하는 죽음으로 만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너머의 세상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증명하겠습니까?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은 감각의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에서는 그 세상을 3가지로 구별합니다. 감각의 세상에서 영혼과 육신이 하나가 되어 만들어낸 삶의 결실에 따라,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천국,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지만 단련과 고통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연옥, 그리고 세상에서 우리가 만든 삶의 결실과 그 판단에 따라 하느님을 만날 수도 없고 하느님의 나라에서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된 지옥으로 구별합니다. 이것도 감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얘기입니다.
16. 우리에게 시작될 죽음너머의 세상이 영복(永福)이 될지, 영벌(永罰)이 될지 그것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세상에서 드러낸 삶의 결과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세상에서 맺는 삶의 결실이 하느님의 판단에 어떻게, 얼마나 일치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저도 이렇게 일반적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마치도 경험한 것처럼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내게 다가올 일을 좋은 것이 되게 하려면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부터 그렇게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합당한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얘기이고, 이 일이 일어나든 저 일이 일어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거나 그러한 세상자체를 아예 인정하지 않는 자세라면 그가 생각한 대로 세상의 삶을 드러내면 될 일일 것입니다.
17. 지금까지 사람의 죽음에 관련된 애기와 그에 대한 신앙의 해석을 길게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는 죽음이라는 경계를 통과한 다음에 일어날 심판에 대한 내용을 말씀드릴 순서입니다. 물론 죽음이라는 경계를 넘어선 일이라고 구별하는 것도 감각의 세상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고, 증명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세상입니다.
18. 심판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입니다.
심판이라는 말이 맘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어떤 행동을 해도 자기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말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 행동을 내가 설명하고 내가 판단하는 것을 심판이라고 하지는 않겠지요? 우리말사전은 ‘심판’의 뜻을 3가지로 설명합니다. [①⦗법률⦘사건을 심리해 옳고 그름에 대해 판결을 내림. ②경기에서, 반칙 등을 판단하고 승패나 우열 따위를 가림. 또는 그 사람. ③⦗그리스도교⦘ 하느님이 지상에서의 삶에 대해서 사후(死後)나 역사의 종말에 판정을 내리는 일]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말하려는 내용은 세 번째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이 세 번째의 내용에는 ‘사후’라고 표현된 사심판과 ‘역사의 종말’이라고 표현된 공심판을 함께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19. 세상에서 산 사람의 의지나 힘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세상에 한정됩니다. 육신과 영혼이 갈라지고 난 다음에는 사람이 제 아무리 뛰어난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 어떤 일도 능동적으로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감각적인 세상만 인정하고 그 세상만 받아들이고 산 사람이 말할 수 있는 죽음의 세계 너머의 일에 대해서 설명이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가능할 수도 없지만 가능하다고 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상입니다.
20. 세상의 삶을 마치고 난 다음, 내 삶을 심판할 자는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영혼을 보내시어 세상에서 육신을 만나 살게 하시고, 그렇게 시작한 삶에서 영혼과 육신이 다시 갈라졌을 때, 그 판단을 하실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이시라고 신앙에서는 말합니다.
21. 심판에 두 가지 표현에 대한 것입니다.
신앙에서 말하는 판단은 두 가지입니다. 사심판과 공심판으로 나누어 말합니다. 사(私)심판은 말 그대로 개인적으로 받는 심판을 가리키는 표현이고, 공심판은 많은 영혼들이 모여 있는 때에 이루어지는 심판입니다. 사심판이나 공심판 모두 살아있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체험한 사람은 없는 것이니, 그것을 현실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고 할 것입니다. 앞서 우리말사전에 나온 심판에 대한 표현에서 세 번째로 말씀드린 표현은 ‘하느님이 지상에서의 삶에 대해서 사후(死後)나 역사의 종말에 판정을 내리는 일’이라고 했습니다만, 사후(死後)에 받는 것을 사심판이라고 하고, ‘역사의 종말’에 받는 것을 공심판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아주 많은 사람들이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겠지요? 그들은 모두 사심판의 과정을 거쳤을 것이고, 공심판은 세상의 마지막 순간이 되지 않았으니, 아직은 실현된 적이 없는 심판입니다.
22. 다음으로 사심판에 대한 내용입니다.
공심판에 대한 것은 교리문답110번에 나오니까, 여기에서는 생략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들을 수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이 사심판의 내용은 앞서 교리문답98번에 말씀드린 내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심판은 개인의 삶이 끝난 순간에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신앙은 설명합니다. 그 순간, 예수님의 심판에 따라 천당(=천국)과 지옥, 그리고 연옥에 대한 내용이 사람이 만든 삶의 결과와 연결됩니다. 이 역시 감각의 세상에서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니, 신앙의 입장에서 해석해야 할 내용입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앞서 말씀드린 것과 많이 다르지는 않습니다만, 천국과 지옥 그리고 연옥에 대한 내용은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