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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139: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56 - 용서받은 부역자, 자캐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11-02 조회수2,684 추천수0
[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39)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56) - 용서받은 부역자, 자캐오

구원받고 싶은 열망 보신 예수 “네 집에 머물겠다” 



■ 부역자(附逆者)


20세기 하반기를 풍미한 가톨릭 대표 문인 구상 시인은 그의 시 ‘나자렛 예수’에서 ‘부역자’란 토착화된 용어를 등장시켰다.

“나자렛 예수! / 당신은 과연 어떤 분인가?
마구간 구유에서 태어나 /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 기구망측한 운명의 소유자
//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 상놈들과 창녀들과 부역자들과 / 원수로 여기는 딴 고장치들과 / 어울리며 먹고 마시기를 즐긴 당신…”

상놈, 창녀, 부역자, 딴 고장치 등 당대 최고의 시인답게 구사한 언어들이 토속적이다. 어림잡건대, 상놈은 성경의 ‘죄인’을, 부역자는 ‘세리’를, 딴 고장치는 ‘사마리아인’을 우리말스럽게 번역한 것일 성 싶다. 용어 선택에 반영된 성경 이해의 깊이에 경탄을 금치 못할 노릇이다.

여기서 ‘세리’를 부역자로 바꿔 표기한 것 만해도 적절함을 넘어 적확에 근접한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세리가 누구인가? 예수님 당시 세리는 이교도 제국 로마의 재정 유지를 위해 자국민들에게 세금을 받아내도록 위임받은 청부업자들이었기 때문에 이방인 취급을 받던 이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교도 제국의 부당한 억압과 통치 구조를 유지해 주는 역할도 수행했기에 미움을 받았다. 더구나 그런 지배 구조 속에서 법을 속여 가며 부당한 징세로 부를 축적하여 더욱 멸시받던 사람들이었다. 그러기에 세리는 말뜻 그대로 부역자(附逆者), 곧 반역행위에 협조한 이들이라 불러 마땅한 것이다.

특히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눈에 세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그리하여 상종하지 말아야 할 족속들이었다. 그로 인해 세리 자신들의 자존감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말씀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3-14).

‘멀찍이’는 신앙심이 있는 이방인들을 배려해서 성전 측면에 마련된 ‘이방인들의 뜨락’을 연상시킨다. 세리들 혈통은 유다인이었지만 스스로 이방인 자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번 글에서 밝힌 바 있지만, 예수님은 이들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먹고 마시기를 즐기셨다(마태 11,19: 마르 2,16 참조). 이 파격적 행보가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미움을 사 급기야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빌미가 되었음은 주목할 일이다.


■ 보상받은 자캐오의 돌출행동

세리에 대한 저 만큼의 이해를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세관장 자캐오 이야기가 극적으로 공감된다. 자캐오는 예리코에 살던 세관장으로서 부자였다(루카 19,2 참조). 그는 최근 예수님이 몰고 온 센세이션을 진즉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특히 세리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고, 그들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를 거침없이 설파하고 있음도 반갑게 여기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동네 거리를 지나가고 계시다는 따끈따끈한 소식이 들려왔다. 곧바로 궁금증이 발동했다.

“과연 듣던 대로 그럴까?”

그의 풍모와 시선만 바라봐도 얼른 감 잡을 것 같았다. 자캐오는 거리로 나가 군중을 헤치고 접근을 시도해 봤지만 녹록지 않았다. 누구도 틈을 내주지 않았을뿐더러 그의 키가 워낙에 작아서 예수님의 머리카락도 볼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순간 좋은 생각이 났다. 그는 내처 앞질러 갔다. 적당한 거리에 이르자 그는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행태인가. 하지만 이는 그에게 인식조차 되지 않았다. 꼭 확인하고 싶던 물음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예수님께선 나 같은 사람도 사랑하실까? 부역자들의 반장이라는 완장을 차고 있는 나, 게다가 키까지 짜리몽땅한 나, 이런 나도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 자녀로 거듭날 수 있을까? 촉이 예민한 나인지라 예수님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을 거야!”

이 일념으로 자캐오는 돌무화과나무를 꼭 붙잡고 예수님이 앞을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돌출 행동이 예수님의 시야에 들어왔다. 자캐오 내면에 가득했던 물음은 고스란히 예수님의 안테나에 수신되었다. 예수님께선 지체 없이 즉답을 주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이 말씀에 자캐오는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뭐라고? 우리 집에? 여태 죄인의 집이라고 누구고 방문을 꺼리던 우리 집에? 그렇다면, 나 비록 세관장이란 직업으로 밥을 먹고 살지만, 저분 눈에는 ‘부정타지 않은’ 하느님 자녀란 말인데…. 나 같은 사람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얘긴데….”

자캐오는 재빠르게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 완전한 치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캐오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허둥거렸다. 그리고 나중에 후회가 될법한 결심을 선언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이 말은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얼마나 은혜가 벅찼으면 재산의 절반을 뚝 잘라 희사한다고 했을까. 그것도 즉흥적으로! 이는 ‘직업 콤플렉스’가 생애 내내 얼마나 큰 중압으로 그 자신을 괴롭혀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여하튼, 방금의 예수님 말씀으로 자캐오의 고질적 직업 콤플렉스는 치유된 셈이다. 이제 하나가 더 남았다. 바로 ‘혈통 콤플렉스’! 앞서 언급했다시피 그는 키가 무척 작았다. 유다인들은 신체적 장애나 약점의 원인을 조상들의 죄에서 찾았다. 이런 맥락에서 자캐오는 자신의 혈통을 탓했음직하다. “나는 혈통이 안 좋아. 그래서 내가 이렇게 키가 작은 거야.” 이런 식으로.

버릇처럼 이런 상념에 잠기려는 순간, 예수님의 권위 있는 선언이 온몸으로 들려왔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루카 19,9).

아브라함의 자손? 축복의 후예? 우리 집안이? 내가? ….

완전한 치유였다. 자캐오는 찰나적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 소리 하늘 나라에 고스란히 박제되어 두고두고 이렇게 읽히지 않을까.

잠깐.
잠시 숨 좀 돌리고요.
얼차려 주신 말씀 되새겨 보고요.
그러니까,
그 말씀이
“너는 내 사랑둥이다”,
“너는 복되다”,
이 선언이신 거죠?
그거 맞죠?

그렇다면,
저 자캐오, 사람들에게 으스대도 되죠?
“여보시오, 예수님이 우리 집을 찾아주셨소”,
“이봐요, 예수님이 나더러 축복의 후예라 하셨소.”
이렇게 동네방네
나발 불어도 되죠?

그러면 됐습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허나
은혜는 갚아야 하겠죠?
거저 받은 축복은 두루두루 나눠야 하겠죠?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마다
할렐루야 아멘입니다.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11월 2일, 
차동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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