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지킬 계명 편’을 한번에
2015-1113.
1. 사람의 삶을 규정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입니다. 물론 순서에 따라 벌어지는 일은 아니지만, 그 일을 순서에 따라 설명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먹는 것만 있으면 잘 살겠다고 생각하던 사람도 그 문제가 해결되면, 입을 것을 생각하게 되고, 입을 것이 생기게 되면 더 멋있고, 더 값이 나갈 법하고 좋은 것을 찾게 될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복음서에서 만날 수 있는 안타까운 표현이기는 합니다만, 머리를 두고 잠 잘 곳을 걱정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한 밤중에 이슬을 피할 곳을 찾던 사람도 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더 좋은 집, 더 안락하고 더 비싼 집을 찾아 움직입니다. 이런 일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만, 우리가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우리의 삶은 이러한 방향으로 계속 움직일 것입니다.
2. 이러한 일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만, 세상이라는 구조에서 사람이 무작정 자유롭게 생각과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하게만 내버려두지는 않습니다. 때때로는 내가 바라는 것과는 반대로 일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간절히 바라는 일은 살짝 피해가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 화를 내봐야 소용이 있지는 않습니다만, 두 번째 같거나 비슷한 상황을 만나면 사람이 같게 살지는 않는다고 할 것입니다
3. 이렇게 자유롭게 살 것을 바라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여기기 쉬운 법이나 규칙 혹은 규정들을 생각하라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지금은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질문의 형식으로 대합니다만, 사실은 우리의 태도나 생각을 묻지 않는 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내가 살고 싶다면, 그리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공동체에 살고 싶다면 그것은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이지, 내 생각과 자세를 물은 다음에, <너는 지키고 받아들일래?> 혹은 <너는 지키지도 않고, 네 마음대로 살래?> 하고 묻지는 않습니다. 많은 경우 내 의지나 태도를 묻지 않지만, 이러할 때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4. 이러한 것이 세상의 삶이라면 신앙인의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요? 신앙인이라면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산다고 할 때 자기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행동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도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답지를 주고, 내가 선택한 대로 살아도 좋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반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기도 하고, 이론의 여지가 없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우리의 삶에 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들의 마음에 들까요? 사람은 자기의 삶에 자유를 주장하면서 이런 경우 태도를 드러내고 싶지만, 사실상 우리가 개인의 생각을 드러낼 삶의 여유는 주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태도이겠습니까?
5. 오늘은 법과 규정에 대한 얘기를 하는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까지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내용에 대해서 아주 오랜 시간동안 얘기했습니다. 사실 여러분의 얘기를 듣는 시간은 아니었고, 신앙과 믿음의 내용에 대해서 제가 일방적으로 말한 시간었습니다만, 오늘 시간도 그 형태에 관해서는 비슷할 것입니다. 천주교회의 교리를 다루는 내용에는 <지킬 계명>이라고 그 내용이 구별돼 있습니다만, 여러분에게 간단하게 말씀드린다고 한 대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 계명에 대한 것은 제가 한두(1-2)번 말씀드린다고 해서 다 알아듣게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여러분이 삶을 통해서 자주 반복해서 들어야 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6. 제가 여러분에게 <지킬 계명>에 대해서 짧은 시간에 끝낸다고 해서 여러분이 이 내용을 가볍게 대해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믿을 교리>에 대해서 길게 한 것은 제가 말하는 내용을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예상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내용이라는 것이 사람의 현실생활과 연결되는 부분이 적거나, 세상의 기준으로만 살아가는 입장에서 그 내용을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고, 저도 그 내용을 완벽하게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안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도 아니지만, 신앙의 내용을 세상의 언어로 설명하려고 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믿어야할 내용에 대해서 말씀드렸다고 해서 제가 여러분에게 알려드린 대로 완벽하고 완전하게 실천하거나 그 뜻에 따라서 살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서 하느님 앞에 삶을 완성할 때까지 완벽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말씀드리면서 더 노력해야한다는 것입니다.
7. <지킬 계명>에 대한 얘기가 담고 있는 신앙의 내용도 짧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 가지 표현으로 간단하게 말씀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는 것이 간단한 표현으로만 가능하다고 알아들으면 될 것입니다. 지킬계명의 내용은 천주십계와 교회법 가운데서 신앙인들이 현실 생활에서 실천해야 할 네가지 규칙과 그 규칙에 따르는 2가지 부가사항을 말씀드리고 요약하고, 이 내용을 정리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8. 천주십계라고 통칭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히브리인들에게 주셨던 계명>인 십계명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지금부터 3500년이 조금 안 되었다고 계산합니다만, 모세가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히브리인들을 이집트땅의 종살이에서 데리고 탈출할 때, 홍해바다(Reed Sea/Red-Sea)를 건넌 뒤, 90일 만에 시나이산에 도착했을 때, 하느님에게서 받은 계명을 가리킵니다. 지금의 이집트땅, 시나이반도 남쪽 편에 있는 대략 3000미터쯤의 돌산에서 받은 계명이라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9. 현실의 우리가 기억하는 십계명과 시나이산에서 모세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계명이 똑같지는 않습니다. 사실상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 어떤 사람이 이러한 관계를 증명하겠습니까마는, 구약성경인 탈출기와 신명기가 기록하는 내용과 우리가 천주십계로 외우는 내용의 표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표현은 다릅니다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십계명은 따로 익히는 시간을 마련하면 될 것이고, 기도문에 나오는 십계명인 천주십계를 함께 합니다.
10. 십계명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함께 했습니다만, 이 기도를 하면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글자그대로만 지킬까요? 이 글자로 표현된 내용이 담고 있는 삶의 정신까지 해석해서 실천해야 하는 것일까요?
11. 계명을 대하는 첫 느낌은 ‘하느님의 뜻을 담은 계명(!)’이라면서, 왜 사람들에 관련된 내용이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현실적인 생각은 그렇습니다만, 사람의 생활은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일과 거리가 떨어져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삶이나 생활과 완전히 분리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라는 것이며, 그 두 가지는 반드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좀 더 과장해서 말하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다는 것은 인간이 올바르게 산다는 것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이제 십계명/천주십계를 순서에 따라서 살피겠습니다.
12. 하느님은 한 분이실까요? 하나이실까요? 말씨름일 수도 있지만, 하나이신 하느님이 맞겠지요? 사람의 입장에서 구별하는 하나, 둘의 개념이 아니라, 사람이 세상에서 만나는 다양한 존재들 중에서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해서는 ‘한 분’보다는 ‘하나’라는 표현이 옳을 것입니다. 그 하나이신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모습이 세 가지이고, 그것을 신학에서는 삼위일체라는 표현과 ‘한 몸, 세 위격’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많이 사용하는 표현은 아니기에 설명이 필요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하느님에 대해서 높임말을 써서 ‘분’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하느님에 대해서, 첫째 계명에서는 하느님을 흠숭하라고 말합니다.
13. 하느님을 흠숭하라는 말의 의미는 교리문답113번에서, ‘하느님을 만유위에 높여서 공경하라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사람이 다른 대상을 높이는 방법으로, 신학에서 사용하는 표현에는 하느님께 바치는 자세를 말하는 흠숭(欽崇,=흠모하고 공경함), 인간들 중에서 하느님과 가장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셨던 성모님께 대하여 우리 신앙인들이 드릴 수 있는 상경(尙敬,=높일 상), 그리고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는 자세이지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에 참여한 성인과 성녀들에게 바치는 공경(恭敬,=공손히 섬김)의 예로 구별합니다. 무슨 표현이 됐든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드러내는 자세가 다른 것일 뿐입니다.
14. 둘째 계명인,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의미는 118항에서 설명합니다. 이 내용에 대한 해석은 불러도 정성을 다해서 하는 것과, 맹세와 허원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람은 맹세나 약속을 할 때, 나보다 힘이 더 강할 것 같은 대상을 빗대어서 약속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하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보다 힘이 강할(!) 대상이 내리는 벌을 기꺼이 받겠다는 뜻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그 일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일이 벌어진 다음에 수습하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잘못된 시작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15. 쉬는 것에 관련된 세 번째 계명은 ‘주일에 대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그 계명을 내리실 때는 하느님께서 세상창조를 마치고 쉬신 날‘안식일
즉 토요일’이었습니다만, 예수님이 오신이래, 교회의 등장이후에는 토요일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로 그 기념일이나 중요성에 대한 초점이 바뀝니다. 왜 쉬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쉰다고 하는 일이 인간에게 도움이 될 일이겠지만, 이 일의 초점은 인간의 편의를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하느님을 흠숭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을 내라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을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드러나는 행동은 한 가지이지만, 그것을 대하는 인간의 해석은 여러 가지가 될 것입니다.
16.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특별히 올바른 자세로 대하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지낸 삶의 결과로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준비하시는 영광에 참여하게 되든지, 그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든지 하는 결과가 생기겠지만, 우리가 인간의 욕심과 생각만으로 하느님의 뜻을 대하는 일은 없어야 하고 그렇게 될 가능성을 줄여야 합니다. 안식일/주일이 쉬는 날인 것은 맞지만, 우리들더러 쉬라고 명령하신 분의 의도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7.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읽어 거룩하게 지낸다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초보적인 신앙의 자세를 가진 사람은 그저 내가 주일미사만 참여하면 된다는 얘기구나 하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주일을 대하는 자세에서 좀 더 적극적인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똑같은 일을 해도 의무로 그 일을 대하는 자세와 덕행으로 그 일을 대하는 자세는 다르기 때문이고, 그에 따른 삶의 결과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 이에 관한 사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지혜가 필요한 일입니다.
18. 십계명의 네 번째는 ‘부모님 공경’에 대한 것입니다.
표현은 ‘부모’라고 했습니다만, 사람이면 누구나 자녀도 되고 부모도 될 수 있으므로, 사람이라는 생명체와 관련된 일이라고 해도 좋을 내용입니다. 상하관계의 다양한 역할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의 관계에서 그 일을 올바로 드러낼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십계명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히브리인들이 받아들인 것처럼, 10가지계명을 613개의 율법사항으로 나누어야 좀 더 정확하게 잘 알아들을까요?
19. 사람에게는 저마다 각자 자기 자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사회에서 맡은 직분대로, 가정에서 맡은 직분대로 각자 자기 자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아는 지식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그 역할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은 다른 사람의 판단이나 지식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내용을 안다면 각자가 갖추고 드러내야 할 올바른 자세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20. 다섯 번째 계명은 사람의 목숨과 생명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생명이나 목숨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해주어야 알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고, 세상에서 가장 으뜸이라고 말할 존재가 남의 도움이나 판단을 얻어야 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 계명은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돼 있는데, 직접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라, 그렇게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의도를 가지고 시작하는 행위와 마음의 움직임까지도 조절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당연히 자기의 목숨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도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발전하고 다양화될수록 그 옛날에는 생각하지 못한 것들도 새로운 문제로 등장합니다만, ‘존엄사(尊嚴死,=<명사>소생할 가망도 없이 장기간 식물인간 상태로 있는 환자에 대하여 생명유지장치 따위에 의한 연명(延命)을 중지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면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 안락사(安樂死,=<명사>법⦘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불치의 병자를 본인 또는 가족의 희망에 따라, 고통이 적은 방법으로 인위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도 해당하는 문제일 수 있습니다.
21. 사람의 목숨에 대한 해석에서 하느님과 신앙의 입장을 배제하는 ‘세상의 차원’에서만 해석한다면, 문제가 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의 생명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만, 그런 설명의 단계를 넘는 다른 얘기는 생각할 수 없을까요? 세상의 시각에서 그렇게 간단하게 시작하는 내용도, 그 다음 단계를 물으면 사람의 뛰어난 지혜는 그 이상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22. 여섯 번째 계명은 ‘사람의 행동으로 잘못될 가능성에 대한 것’입니다.
간음(姦淫·姦婬)이라는 행동은 말하기도 불편한 내용입니다만, 사전은 ‘부부가 아닌 남자와 여자가 성적인 관계를 맺는 일’로 해석합니다. 표현은 대표적인 일로 이렇게 드러냅니다마, 상대적인 입장에서 강한자라고 생각할 남자나 여자가 다른 상대방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규정한 행동의 의도를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해도, 하느님의 모상을 간직하고 있는 다른 상대방을 내가 물건으로 취급하는 자세를 금지하고, 나와 같은 참된 생명체와 사람으로 대하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았다고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23. 하느님의 뜻을 담은 계명은 인간이 드러내는 삶의 작은 부분까지도 관심을 갖습니다. 그 내용의 하나가 도둑질에 관련된 것입니다. 도둑질을 하는 것과 하느님의 계명에는 어떤 관계가 있겠습니까? 보통은 우리가 관련이 없는 서로 차원이 다른 일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계명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다른 사람의 재산에 끼치는 손해뿐만이 아니라, 자기의 재산을 잘못되게 사용하는 일에 대한 것도 금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명령이 부정적이라고 해서 내가 피한다는 보장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만, 올바른 태도는 필요합니다.
24. 십계명의 여덟 번째 계명은 거짓증언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람이 말을 하지 못한다면 생기는 문제가 매우 다양할 테지만, 그렇게 할 줄 알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도구인 말로써, 다른 사람과 자신의 삶에 해가되는 일을 금지하는 내용이 거짓증언에 대한 것입니다. 거짓증언은 내가 하는 약속으로 다른 사람을 파멸의 길로 몰아넣는 행동입니다. 내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사람이 나에게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소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내게 부정적인 결과가 오지 않게 하자고 기억할 계명은 아닙니다만, 기억하고 살아야 할 것에 해당합니다.
25. 탈출기와 신명기의 성경에는 9번째 계명과 10번째 계명이 하나로 나옵니다만, 교회에서 기도문으로 사용하는 것에는 두 가지를 나눕니다. 9번째 계명은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가부장(家父長)사회와 남자를 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하던 때에 여성은 재산의 한 부분이었습니다만, 그런 시대에도 하느님의 뜻을 담은 정신은 뭔가 달랐습니다. 재산으로 생각하는 일은 잘못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만, 상대적인 약자인 여성에 대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6번째의 계명에,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씀씀이는 9번째의 계명에서 바로 잡을 것을 말합니다.
26. 십계명의 10번째 계명은 물건에 대한 것입니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7번째 계명인 도둑질의 행동과 관련하여,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제대로 다스릴 것을 권고하는 계명입니다. 불의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남의 물건을 대하겠다는 자세가 있을 때, 사람은 잘못된 행동을 하는 법입니다. 잘못된 행동도 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그 행동을 하지 않게 하거나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마음의 움직임도 제대로 대해야 하는 법입니다
27. 지금까지는 하느님께서 세상에 있던 히브리백성을 선택하시어 당신의 백성으로 삼는데, 적용하는 규정이었던 계명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담은 직접적인 표현을 계명(誡命,=종교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이라고 표현합니다만, 이러한 하느님의 계명을 세상에 적용하여 실천하는 구체적인 것으로 ‘교회법(敎會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현재 사용하는 교회법은 요한바오로2세법전이라고 부릅니다. 이 법전의 항목은 모두 1752개로 돼 있습니다. 그 많은 내용들이 모두 다 사람의 생활을 올바르게 이끄는 작용을 합니다만, 상당수는 우리의 구체적인 행동을 제시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28. 교회법전에서 계명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담아서 말하는 내용을 별칭으로 성교사규(聖敎四規)라 합니다. 의미는 교회공동체에서 정한 4가지 규칙이라고 알아들으면 될 것입니다. 그 내용은 ‘주일과 대축일에는 미사에 참례한다’와 ‘교회가 정한 날에는 대재와 소재를 지킨다’와 ‘고해성사에 대한 규정’과 ‘영성체를 하는 규정’입니다. 이런 것까지도 교회법에서 명령하는 이유가 있는가 하고 우리가 달리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29. 성교사규를 통한 교회의 의도는 4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처음으로 교회법을 정하고 실천하기를 강조하던 때보타 세상이 복잡해지고, 발전하면서 글자그대로 법을 지키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만, 그 법의 정신을 살려서 우리가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이 법에 대한 올바른 의도입니다. 십계명의 세 번째에 나오는 내용을 성교사규의 첫 번째에서 자세한 방법으로 설명합니다. 세상목숨의 유지를 위하여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새기고 그 뜻에 자신의 삶을 맞추고 그에 관련된 것을 돌아보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이 제1규의 내용입니다.
30. 제2규에는 대재와 소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불렀습니다만, 요즘에는 금식(禁食)과 금육(禁肉)이라고 바꾸어 부릅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시위(示威)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세상도 되었습니다만, 그 일을 통해서 내 몸을 벗어난 다른 대상에게 생긴 일에 참여하고, 그들의 고통과 힘겨움에 보탬이 되는 결과를 만들자고 권고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 금식이라면, 금육은 서양인들에게 주로 적용될 내용일 것입니다. 육식을 주식(主食)으로 삼고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그 주식(主食)인 육식(肉食)을 잠시나마 중지하고, 교회의 정신에 비춰 그로 인한 결과를 나눌 것을 권고하는 것이 삶의 정신에 해당합니다.
31. 고해성사에 대한 것은 제3규에 해당합니다만, 1년에 1번씩을 말하는 것은 세계교회법이고, 우리나라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제3규의 내용은 1년에 2번씩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시기에 대한 표현을 담아서, 성탄판공성사와 부활판공성사라고 부릅니다. 물론 이 시기에만 할 수도 있습니다만,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자신의 삶을 자주 돌아보고 반성하는 것이 낫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32. 영성체에 해당하는 것은 제4규에서 말합니다. 고해성사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통하여 하느님 앞에 올바르게 나설 준비를 했으면, 전례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실 것을 얘기하는 규정입니다. 요즘에 해당되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7~800년 전에는 인간의 부당함을 많이 강조하여, 평생에 한번만 영성체를 해야 한다는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잘못을 지적하고 올바르게 행동할 것을 말하는 내용입니다만, 미사에 오기만 하면 마음과 삶의 준비와는 상관없이 영성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일 것입니다.
33. 지킬 계명에 나오는 십계명과 성교사규외에 2가지 규정을 더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법이나 규칙이라기보다는 그 정도가 조금 더 약한 표현으로 규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규정은 두 가지인데, 신앙인으로서 교회공동체가 움직이는 일에 필요한 재정적인 부담을 실천하는 교무금납부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혼인에 대한 것을 말하는 혼인법입니다. 아무도 본적이 없고, 그것을 사람의 힘으로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만, 구약성경 창세기 1-2장이 기록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을 혼인으로 인정해주셨음을 배경으로 합니다. 성경이 이런 내용을 기록한 것을 성경학자들은 3000년에서 2500년 쯤 전이라고 합니다만, 그 이후로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의 응답은 일부다처나 다부일처의 사회를 거쳐서 요즘에는 다시 일부일처의 사회로 진행돼 왔습니다.
34. 지금까지 십계명과 성교사규, 그리고 2가지 규정으로 지켜야 할 내용을 설명했습니다만, 사실 이러한 내용들은 사람의 삶을 제한하거나 옥죄는 역할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느님께 다가서면서 선물인 덕을 바칠 수 있는 진정한 자세로 나아가게 하려는 목적을 지향하는 내용입니다. 덕은 두 가지로 크게 나눕니다. 향주덕이 그 하나이고, 윤리덕이 다른 모양입니다.
지혜, 의로움, 용기, 절제.
35.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덕인 향주덕, 인간의 삶을 통해서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며 기본이 되는 네 가지 기둥에 해당하는 덕을 우리가 기본으로 간직하고 있는지 돌이켜보는 것도 내 삶의 완성을 위한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36. 사람의 행동은 결과를 맺는데,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이러한 덕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결과인 죄로 말할 수 있습니다. 죄는 대죄와 소죄를 구별해서 말합니다만, 어떤 것이 큰 것이고, 어떤 것이 작은 것이라는 규정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심리적인 자세로 알아들어야 할 내용입니다. 엄격하게 규정된 내용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큰 죄이고, 어떤 것이 작은 죄이겠습니까? 지난 시간 언젠가에, 인간을 죽음으로 이끄는 죄를 대죄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대죄는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이고, 소죄는 하느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는 죄라고도 설명했습니다만, 이런 표현에 따라서 어떤 것이 그 기준에 닿는지 정확하게 설명할 방법은 사실상 없습니다. 요즘처럼 과학적인 세상(!)에서 수치와 그래프로 계산하여 여러분에게 제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만, 우리의 삶에 대하여 하느님도 과연 우리들처럼 불분명하게 판단하실까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37.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사람의 삶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7가지 죄의 근원 혹은 기둥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전통적인 교리에서는 칠죄종이라고 불렀습니다.
38. 이 7가지 근원에 해당하는 죄들의 내용을 국어사전에서 찾아 그 내용을 요약하는 방법으로 이 부분의 설명을 대신하겠습니다.
교오(驕傲) : 잘난 체하고 뽐내며 건방짐. 교(驕):교만할 교
간린(慳吝) : 몹시 인색함 인(恡):아낄린 린
미색(迷色) : 색으로 유혹함 미(迷): 미혹할 미
분노(忿怒) : 분개하여 몹시 성을 냄. 또는 그렇게 내는 성.
탐도(貪饕) : 재물이나 음식을 탐냄 도(饕): 탐할 도
질투(嫉妬) : ②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깎아내리려고 함. 질(嫉):시기할 질
해태(海苔) : ① 게으름 태(苔):이끼 태
39. 지킬 계명에 대한 끝부분에 도달했습니다. 계명이라는 것을 대하는 사람이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그 계명을 부담스러운 것으로 대하는 사람이라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40.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처음 십계명을 내릴 때, 어떤 의도로 내리셨는지 제가 그 상황에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닙니다만, 교회공동체의 해석은 ‘이민족들에게서 구별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고자 계명을 내리시고, 그 계명을 실천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느님께 다가가는데 방해되는 세 가지 요소를 가리켜 삼구라 하고, 그 대상은 마귀와 세속과 육신으로 말합니다. 악의 세력이야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없겠지만, 세속에 사는 인간으로서 육신을 잘 다스려 하느님께 다가가는데 좋은 선물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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