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성총을 얻는 방법—성사편
2015-1120.
1. 이제 교리내용으로는 ‘뜨리덴티노 공의회의 천주교요리’의 세 번째 부분으로 돼있는 ‘하느님의 힘이신 은총’을 다루는 부분에 도착했습니다. 사람은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성장과정에 따라 달라집니다만, 교리의 내용에도 배우는 과정에 따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달라진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말 그대로 신앙의 내용은 세상의 삶을 잘할 수 있는 지혜나 지식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이고, 내가 교리의 내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고 해도 현실에서 느낄 수 있는 놀라운 은총을 구별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믿음에 중요한 것(=믿을 교리)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 것이고, 실천을 위한 것(=지킬 계명)은 실천을 위한 것이며, 하느님의 도움을 입는 것(=은총을 얻는 방법인 성사편)은 그대로 중요성을 갖습니다.
2.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 대답은 ‘사람이 자기 삶을 통해서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일’입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에게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 묘안(妙案,=뛰어나게 좋은 생각)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교리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설명을 세 번째 부분, 은총을 얻는 방법에서 설명합니다.
3. 사람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은 세상을 사는 도구인 육신(肉身)의 모습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인간의 경험을 적용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증거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구성하는 다른 요소인 영혼(靈魂)이 몸과 함께 움직인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만들어낸 결과로 하느님과 일치하게 되거나 멀어지거나 하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는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이 아닌 멀어지는 일에 대한 것은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4. 세상에서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고 뛰어난 존재라고 말해도, 신앙을 더 먼저 말하는 입장에서는 인간이 자기가 가졌다는 힘으로는 하느님과 일치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인간의 힘을 무시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서로 다른 세상에서 상대방을 평가하는 것이니 그 일도 쉽사리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5. 신앙에서는, 세상의 삶을 마치고, 육신과 분리된 영혼이 하느님과 일치하게 되는 것은 세상의 생명이 끝나고 이루어지는 것이라 말하고, 그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하느님의 도움/은총’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180번교리문답) 이때 말하는 하느님의 은총은 내가 원하는 순간에 아무 때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용어입니다만, 이 일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려면 기도와 성사가 필요합니다.(181번교리문답)
6. 순서에 따라서, 먼저 나온 은총(恩寵,=Grace)이라는 말을 설명하겠습니다. 은총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제 아무리 열심히 노력했다고 해도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하느님의 은총이 자신에게 오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물론 사람의 힘으로, 하느님의 은총이 오게 하는 것은 어렵다거나 불가능하다고 해도, 하느님의 은총이 내 삶에 찾아오려는 일을 막을 수는 있습니다. 사람의 힘이 부정적인 일에는 강할 수 있다는 것이니, 삶의 경험을 근거로 하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은총은 인간이 하느님에게서 받는 ‘공짜 선물’입니다. 은총은 인간의 본성을 넘는다는 표현[=초성(超性)]을 썼으니,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것[=생득적(生得的)]은 아닙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뒤 특정한 순간에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이고, 인간의 본성을 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182번-183번교리문답)
7. 이 은총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축복에 참여하게 할 수 있게 하는 상존성총(=은총)과,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돕는 조력은총(=성우)로 나누어설명합니다. 표현은 이렇게 하지만, 우리피부에 와 닿을 만큼 실감이 있는 설명은 아닙니다. 둘 다 감각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의 본성을 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총은 하느님의 힘으로 우리 사람들에게 오는 것이고 우리는 그 은총이 우리에게 힘을 드러내도록 협조할 수도 있고 방해할 수도 있지만, 이 은총은 우리가 범하는 죄로 우리영혼에게서 활동하기를 멈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을 멈추게 한다고 했으니 하느님의 힘이 약한 것일까요? 그렇게 보는 것보다는 좋은 일이 생기게 하려면, 인간의 협조가 중요하다는 소리입니다.
8. 세상에 사는 사람의 삶에는 누구나 목적이 있습니다. 내가 바라고 세운 목적이나 목표가 있고, 목표에 도달하려고 행동하지만, 사람이 바라는 결과를 얻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행동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지만, 그 행동의 결과는 내가 정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람들로 하여금, 좋은 목표와 목적을 세우고 살게 하는 것이 은총이나 성우의 의미라고 한다면, 그 의도에 따라 우리가 행동할 때 만들어낼 수 있는 결과는 ‘공로(功勞)’라고 말합니다.
9. 은총(恩寵)과 성우(聖佑)의 도움으로, 우리가 만드는 삶의 결과를 공로라고 했는데, 이 공로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192번교리문답)과 이 공로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에 대한 설명이 193번교리문답에 나옵니다. 신앙인이 세상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한 다음에 맺는 결과로서 얻을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바란다고 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그 목표나 목적에 대한 자세는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에 대한 대답이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어도, 교리문답의 193번교리문답에는 ‘은총을 더함, 영생, 천당영광의 더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중 어느 것도 현실의 우리가 그 존재를 알거나 체득(體得)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서 그런 것은 없다고 부정해도 좋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경험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세상의 삶은 경험을 넘어선 세상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라는 표현은 이렇게 경험을 넘어선 세상도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도 포함합니다.
10. 은총과 성우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하면, 그에 상응하는 인간의 노력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하느님의 뜻에 일치할 수 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내가 세상에 사는 인간으로서 신앙의 정신을 기억하고 알아들은 대로 그 모습대로 살려고 한다면 뭔가 하느님의 뜻에 조금이라도 일치하는 결과는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기 위해서 삶의 기준으로 삼고,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실천할 수 있기를 바라는 표현을 가리켜 기도(祈禱)라고 말합니다.
11.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은 <194번교리문답>에 나옵니다. 낱말풀이입니다. 이 낱말의 뜻을 알았다고 해서 내가 기도를 완전하고 완벽하게 잘 하게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94번교리문답>에 나오는 기도의 목적은, ‘우리 마음을 들어 천주께로 향함이니, 곧 ①천주를 흠숭하며, ②천주께 이왕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③죄를 사하여 주심을 빌며, ④자기와 다른 이를 위하여 요긴하고 유익한 모든 은혜를 구함’이라고 전통적인 의미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러한 의미를 담아서 간단하게 ‘신앙인인 나와 하느님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라는 표현으로도 설명합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만을 무조건 늘어놓는 것을 기도라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요즘의 표현으로 설명하는 기도에 대한 것은 198번교리문답에 아주 조금(=묵상기도는 천주와 담화하거나) 나옵니다.
12. 역시 낱말풀이입니다만, 기도를 두 가지로 나눈다고 197번교리문답에서는 설명합니다. 구별은 간단합니다. 드러나는 말이 없는 묵상기도, 소리와 함께 일정한 형식이나 내용이 있는 염경기도입니다.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낫다거나 더 완벽하다는 것은 말하지 않습니다. 단계를 얘기한다면, 염경기도에서 묵상기도로 발전하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일 것입니다.
13. 기도문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 자세한 내용을 지식으로만 구별해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만, 정해져 있는 기도문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 또 만들 수도 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없어지거나 바뀔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이 됐든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그 뜻을 우리가 삶에서 실천하자고 하는 의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14. 성경에도 어떤 율법학자가 나서서 예수님께 하는 질문에 ‘첫째가는 계명’이 어떤 것인지를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마르코12,28~)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첫째뿐만이 아니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둘째 계명도 알려주십니다. 이런 본보기처럼, 기도문에 대해서 말할 때, 첫째와 둘째를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200번교리문답>에서 ‘가장 완전한 기도는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주님의 기도’라고 말하고, 같은 문답에서 그 다음으로 중요한(!) 기도는 성모송이라고 구별합니다.
15. 주님의 기도를 가장 완전한 기도라고 하는 것은 그 글이나 내용이 아름답고 놀라운 내용이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알려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모송은 우리 주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실 일을 알려주러 오신 가브리엘천사와 성모님의 대화가 전반부이고, 후반부는 성교회가 비는 말씀으로 돼 있습니다.
16. 기도에 대한 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강조하면 사람들이 잘 알아듣고 행동하겠습니까? 사실은 강조하는 일로 잘 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고, 우리가 얼마나 기도를 가까이하고 반복하느냐에 따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알아들을 수도 있고 실천할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을 알면 좋겠습니다.
17. 다음은 성사(聖事)에 대한 것입니다. 성사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설명(203항교리문답)합니다. 사람의 삶에도 정표로 주고받는 반지나 선물이 있습니다. 오고가는 선물 그 자체의 가격이나 가치에 의미가 다를 수도 있지만, 사실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표현하려는 자세이고 마음의 크기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사를 은총의 표지(=SIGN)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18. 신앙교리에서 우리에게 설명하는 은총의 표지, 성사(聖事)는 7가지로 말합니다. 그 내용을 자세하게 아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배우는 내용을 잘 익혀서 삶에 도움이 되게 실천하는 일입니다. 성사에 대한 교리내용의 설명은 아주 자세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믿을 교리에 대한 내용을 강조하는 데에 시간을 많이 사용했기에, 성사편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다루지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성사편을 무시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사는 신앙생활의 단계에 따라서 우리가 만나는 것이기에 여러분에게 한꺼번에 말씀드리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19. 여러분과 함께 하는 이 시간은 예비자교리를 하는 시간이고, 이 시간에 하는 교리는 신앙을 처음으로 만나는 성세성사/세례성사를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신앙교리에 대한 설명을 완벽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만, 그렇게 거창한 꿈을 갖는다고 해도 이 시간은 신앙인으로 살기 위한 최소한의 내용을 말하는 준비시간이기도 합니다. 이 내용을 다 마치고, 일정한 준비를 끝냈을 때 세례성사를 거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세례성사를 했다고 하고, 그 시간을 넘었다고 해서 내가 신앙에 대해서 알아야할 것은 다 배우지 못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20. 성사(聖事)는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에게 내려오는 ‘은총의 통로’라고 말합니다. 눈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에서 다루는 내용을 그렇게 설명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는 방법이나 길이 7개만 있느냐고 하면 판단이 또 달라질 수 있습니다만, 교회공동체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설명으로 말할 수 있는 내용을 7가지 성사로 규정합니다. 나누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만, 그 구별이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고, 요즘 표현하는 방식으로 7가지 성사의 이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세례성사, 고해성사(=화해성사), 성체성사, 견진성사, 신품성사, 혼인성사, 병자성사입니다.
21. 세례성사(211번교리문답)는 ‘물로 씻는 예절’이라는 의미를 담아서, 구약성경 창세기가 전해주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를 씻는 성사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하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생명을 받아, 내가 세상의 삶에서 그 결실을 맺게 하는 성사입니다. 신앙인으로 살고자 할 때, 세례성사는 여러분이 처음으로 만나는 성사입니다. 이 세례성사를 해야만 교회공동체 안에서 훗날 이루어지는 다른 성사들을 받을 수 있는 자격도 생깁니다.
22. 순서에 따른 설명은 아닙니다만, 입문성사로 흔히 구별하는 성사로 견진(堅振)성사(224번교리문답)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40일이 지난 뒤 승천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하느님에게서 내려온 성령의 모습으로 오시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힘을 받게 하는 성사입니다. 세상신앙인들이 하느님의 힘을 받고 7가지 선물을 주는 성사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신다는 뜻에서 하는 성사가 견진성사이기는 합니다만, 이 일이 행동으로 드러나려면 하느님의 은총과 함께 우리의 협조와 노력도 필요한 일입니다.
<슬기, 통달, 의견, 굳셈, 지식, 효경, 두려워함>
23. 사람은 세상에서 살다가 원하지 않으면서도 불편한 일을 합니다. 누가 그런 일을 하는지 구별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지만 누구나 하는 일이 부정적인 결과를 맺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런 행동을 가리켜, 세상에서도 비슷한 표현을 씁니다만, 신앙에서는 죄(罪)라는 표현을 씁니다. 신앙에서 사용하는 죄라는 표현은 그 삶의 결과를 그대로 놓아두면 하느님께 내가 다가서거나 하느님의 초대에 내가 응답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결과들입니다. 대죄와 소죄로 구별한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신앙에서 말하는 죄는 하느님의 뜻을 담은 십계명, 교회의 정신을 담은 교회법의 4가지 규정을 어기고 실천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결과들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가리키는 ‘죄(罪)’를 신앙의 입장,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방법, 교회가 인정한 방법과 절차에 따라 신앙인들에서 죄를 없애주거나 없게 하는 것을 가리켜 고해성사/화해성사라고 부릅니다.(236번교리문답)
24. 교회공동체와 신앙에서 죄를 용서해준다는 것은 세상의 언어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교회와 신앙에서 죄를 용서해준다는 것의 의미는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만들어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를 범하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결과를 만든 사람이 다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으로 살게 해준다는 것이고, 그것이 고해성사나 화해성사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에서 말하는 고해성사/화해성사를 올바로 해석하는 자세입니다.
25. 사람이 하느님께 거리낌이 없이 다가서게 해주는데 중요한 성사인 고해성사에 대한 설명은 아주 깁니다. 길다는 것은 많은 경우 사람들이 그 효과를 잘 믿지 않는다는 소리도 되고, 그 효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소리도 됩니다. 그래서 설명이 길어지기는 합니다만, 하느님의 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삶으로 그것을 드러내려는 신앙인이라면 올바른 자세를 가져야 할 일입니다.
26. 고해성사를 통하여 내가 하느님께 다가서는 일에 올바른 자세를 만든 다음에 순서에 따라 등장하는 것이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신앙인인 우리가 받아먹는(=모시는) 일로써, 성사중에서 가장 으뜸이며 가장 큰 중요성을 갖는 성사입니다(281번교리문답). 성체는 우리가 눈으로 보기에 작은 밀떡 모양으로 돼 있습니다. 원재료는 밀을 물에 반죽하여, 작은 형태로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을 제병(祭餠)이라고 부르는데, 그 제병이 미사 때에 사제가 하는 일정한 예절에 따라 그리스도예수님의 몸이라고 되었다고 신앙에서는 말합니다만, 세상의 과학에서는 증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복잡한 신학의 용어입니다만, 겉모양은 그대로 있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물체의 본질(本質)이 바뀌었다는 뜻으로 ‘실체(實體)변화’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빵이 성체로 바뀐다는 것은 과학에서 제시하는 방법으로든지 확인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그 변화를 믿고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27. 세상에서 일정한 기간을 살다가 그 삶을 마쳐야 하는 인간에게는 필연적으로 육체의 고통이 따릅니다. 이때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의 고통에 하느님도 함께 하심을 알려주고, 그 고통을 이겨내는 힘을 주는 성사를 가리켜 ‘병자성사(病者聖事)라고 합니다(302번교리문답).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며, 그를 구원해주시도록 기름을 발라주는 성사라고 해서, 예전에는 ‘종부성사(終傅聖事)라는 무서운 소리로도 불렸습니다만, 요즘에는 그 말보다는 병자성사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병자의 도유’(unctio infirmorum)
28. 병자성사를 받았다고 해서, 세상에서 겪는 고통에서 한 순간에 해방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바람이야 간절할 수 있지만,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하지 못하는 시대가 된 후, 그런 말보다는 삶이 힘겨운 시기에 도달한 사람에게 힘을 주는 성사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29. 다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표현은 아닙니다만, 신품성사(神品聖事)라는 표현(307번교리문답)이 있습니다. 세상에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회의 성사들을 집전할 수 있는 신권(神權)을 주는 성사를 가리킵니다. 일정한 교육과 그 교육에 따른 선발과정은 있습니다. 로만가톨릭에서는 미혼남자에게만 적용되는 한계는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제가 된 이들은 각 본당이나 수도회에서 신앙인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신앙공동체의 사람들이 하느님과 일치하도록 정해진 역할을 실천합니다.
30. 일곱 개의 성사에서 마지막은 ‘혼인성사’입니다(312번교리문답). 이 마지막이라는 표현이 ‘삶의 끝에서 받는 성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혼인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이루는 가정을 ‘남편과 아내의 유일하고 영원한 관계를 성화(聖化)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설정한 성사’를 가리킵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이루는 가정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이루고 실천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자세로 이루어지는 성사입니다. 요즘에는 가정사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가정을 ‘작은 교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31. 이제까지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실현되는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한두 번 듣는 것으로 여러분이 교회공동체에서 말하고 싶은 것을 다 알게 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일의 시작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에 참여하고, 그에 알맞은 삶의 결과를 만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