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42)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59) - 열세 번째 제자, 마리아 막달레나 무덤까지 찾아간 충정… 부활의 첫 증인이 되다 ■ 명예 훼손에서 풀리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초기 교회 시절부터 오래도록 명예훼손에 시달려온 희생양이었다. 그녀의 이름 뒤에는 늘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라는 평판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이는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이 성경에 등장하는 각기 다른 세 여인을 동일인물로 간주한 데에서 비롯된 오류였다. 즉, 마귀에 들렸다가 예수님 덕에 해방된 ‘마리아 막달레나’(루카 8,2 참조), 라자로와 마리아의 동생으로서 순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렸던 ‘베타니아의 마리아’(요한 12,3 참조), 그리고 예수님 발에 옥합 향유를 부은 ‘죄인인 여자’(루카 7,37 참조), 이들 세 여인이 각기 다른 인물임에도 서로 혼동되는 바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얼핏 보면 그럴만한 구석이 없지 않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마리아는 이름으로 혼동되고, 마리아와 ‘죄인인 여자’는 향유 공세로 혼동된다. 이렇게 서로 얽히다 보니 어느새 ‘마리아 막달레나’는 ‘죄인인 여자’였다는 오해가 생겼던 것이다. 반갑게도 바티칸에서는 현대 성경 연구 결과를 토대로, 1969년 마리아 막달레나는 단지 일곱 마귀에서 벗어난 여인일 뿐이라고 천명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견해가 오류였음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다. ■ 제자 서열 13번 예수님은 남자로 열두 제자를 뽑아 채우셨다. 그 외곽에 72제자단을 두셨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고 다니실 때, 72제자단은 챙기지 못하실 경우에도 꼭 몇몇 여인들만은 끼워주셨다는 사실이다. 왜 그러셨을까. 그 답에는 예수님의 고민과 배려가 함축되어 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제자 속에 여인들을 끼워주고 싶어 하셨던 듯하다. 하지만 당시 문화와 전통적인 제약 때문에 그러지 못하신 것 같다. 그 시절 여자들은 물건 취급당하여, 사람 숫자에 포함되지 않기에 아무리 여자를 끼워도 열둘이 채워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선 열두 명 숫자는 남자로 채운 다음, 바로 그 외곽에 공동 ‘서열 13번’으로 여성들을 제자단으로 모으셨던 것이다. 이는 아주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여권 신장의 관점에서 봤을 때, ‘거기까지’가 아니라 ‘거기서부터’의 의미를 지니는 신발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전하는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탁월한 지혜가 두드러지게 읽힌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1-3). 여기서 예수님께서 주로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여인들을 일행으로 삼으셨음이 드러난다. 왜 그러셨을까. 당시 풍토에서 멀쩡한 여자들은 집을 나와 싸돌아다니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잘못하면 풍기문란의 죄로 몰릴 수도 있다. 이에 반해 치유받은 여인들은 뒤탈의 소지가 없다. 옛날에는 한번 고질병에 걸리면 치유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 인생은 끝난 것이었다. 게다가 ‘일곱 마귀에 걸린 사람’이란 오늘날 우리가 점잖게 이름을 붙여준 것이지 시쳇말로는 ‘미친X’ 격이었다. 아예 집에서 내놓은 사람이었다는 얘기다. 이들을 예수님께서 고쳐서 데리고 다니셨던 것이다. 바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역발상의 지혜다. ■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가 된 까닭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반드시 열두 제자가 있었다. 이 열두 제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여인들이 있었다. 전술하였듯이, 여인들은 열세 번째 제자였다. 그 여인들의 대표가 마리아 막달레나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현장에서 이 공식이 허물어졌다. 제자들은 없는데 마리아 막달레나 일행이 꼭 함께 했던 것이다. 결국 끝까지 의리를 지켰던 이들은 여인들이었다. 여인들의 충정은 무섭다. 안식일 다음날 꼭두새벽에, 마리아 막달레나 일행은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한다. 갑자기 시체를 수습하는 바람에 향유를 발라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여인 일행은 사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다. 단지 장례를 온전히 치러드리려고 간 것이었다. 이 여인들의 정성은 사심이나 권력욕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다 끝장난 판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여인들을 그렇게 움직였을까. 한 마디로 감사였다. 몹쓸 질환으로 망친 인생 팔자를 고쳐주신 예수님이 끝내 고마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저분은 나의 은인! 나 목숨 바쳐 따르리라!” 하는 비상한 의리가 발동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 화답으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부활의 첫 번째 목격 증인이 되는 영광을 주셨다. 이 파격적인 조치 때문에 2천 년 역사 속에서 교회도 수난이고 예수님도 수난이다. “둘이서 수상하다. 관계가 수상하다.” 이런 수많은 염문설이 혹은 ‘문학’의 형식으로 혹은 ‘무신론’의 이름으로 나도는 것이다. 또 하나의 불리한 결과는 당시 여자는 증인으로서의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얘기해도 소문만 퍼지지 진실성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쉽사리 믿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이런저런 문제의 소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다(요한 20,16-17 참조).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 한 마디로, 그것이 그 순간의 정의였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만약 우리가 예수님이라면, 꼬박 밤새면서 동트기까지 기다렸던 여인에게 나타날까, 아니면 잠 쿨쿨 자는 베드로 사도에게 나타나서 “일어나, 일어나” 하면서 깨울까. 당연히 깨어 기다리는 사람에게 일터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우리가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정말 예수님께 눈먼 사랑을 보여드리면, 교황님보다 더 먼저 예수님을 만날 수도 있다. 이 시대에도 예수님은 항상 가장 절박하게 기다리는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가시는 것이다. 그날 그녀가 바쳤을 감사기도를 이제 우리가 바쳐야 할 차례다. 라뿌니, 황망한 상실로 뻥 뚫린 구멍 메울 길 없어 무덤 동산 망연히 거닐고 있을 때, “마리아야!”(요한 20,16) 하시며 홀연 광채 발현으로 놀래키심에 눈물로 부르는 당신의 이름, 나의 사부님. 라뿌니, 그날 십자가상에서 “주여, 주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마태 27,46 참조)를 몸부림으로 외치시며 마지막 숨 몰아 내쉬심에, 비통으로 불렀던 당신의 이름, 나의 사부님. 라뿌니, 그 잊을 수 없던 날, 당신의 한마디로 하여 내 일생의 지옥이었던 ‘일곱 마귀’에게서 풀려나, 영면에서 깨어난 듯 눈을 배시시 뜨고서 낯을 가리며 마주했던 당신의 황홀한 눈빛에, 부끄러움으로 처음 불렀었던 당신의 이름, 나의 사부님.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11월 22일, 차동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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