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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143: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60 - 실증주의자, 토마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11-30 조회수2,625 추천수0

[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43)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60) - 실증주의자, 토마스


“믿는 이 되어라” 말씀에… “저의 하느님” 고백

 

 

■ 이과형 머리

 

나는 이공대를 졸업한 후 신학도가 되었다. 이과대학의 학업분위기와 문과대학의 그것은 사뭇 달랐다. 이과학습에서는 논리의 연결고리가 생략되면 명제가 성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문과학습에서는 극심한 논리의 비약이 있어도 문장이 성립된다. 그 공백이 문학적 상상력으로 메워지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이과대 학생들과 문과대 학생들의 대화 문화는 전혀 딴판이다. 이과생들은 완전한 논리를 잣대로 삼기에 대체로 ‘알아도 모르는 체’하지만, 문과생들은 상상력의 보충을 믿기에 거개가 ‘몰라도 아는 체’하는 경향이 있다.

 

전수조사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에 대표적인 이과형 머리 2인방이 있다. 바로 토마스와 필립보다. 이들 두 인물 가운데, 이번 글에서는 지면관계상 필립보는 논외로 하고 토마스에게만 초점을 맞춰보자.

 

토마스는 교회 전통에서 회의론자로 치부되어오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 대신에 ‘이과형 머리’로 바꿔 불러주는 것이 보다 온당할 듯싶다. 토마스의 이과형 사고방식은 요한복음 14장에 잘 드러나 있다. 예수님은 곧 닥쳐올 십자가 수난에 대비하여 제자들에게 단단히 일러두신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1-3).

 

죽으심과 다시오심에 대한 예고다. 이 슬픈 위로에 더하여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한 14,4)라고 말씀하신다. 이 길은 당연히 십자가를 경유하여 아버지께로 향한 수난 길이다. 하지만 ‘이과형 머리’ 토마스는 보다 구체적인 표명을 물음으로 청한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15)

 

이 순간 토마스는 영락없이 꼬치꼬치 캐묻는 학구파 학생이다. 그의 까탈스런 물음 덕에 오늘의 우리도 귀하디귀한 말씀을 얻게 되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이 문장은 예수님의 정체와 본질을 핵심적으로 밝히는 매우 소중한 말씀으로 즐겨 인용되고 있다! 토마스 덕이다. 융통성 없어 보이는 토마스의 물음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푸짐한 재미를 보게 해 준 셈이다.

 

 

■ 다락방 이야기

 

‘이과형 머리’와 ‘실증주의자’라는 말은 거의 한통속이다. 토마스는 이후 다락방 사건에서 실증주의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직후 제자들은 다락방에서 문들을 겹겹이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떨며 숨어 있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뜬금없이 나타나셨다. 운 없게도 토마스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였다. 예수님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는 인사말에 이어, 성령과 함께 용서의 권한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셨다(요한 20,22-23 참조).

 

토마스는 나중에 다른 사도들로부터 예수님 발현의 자초지종을 전해 듣고 즉각적으로 저 유명한 말을 한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토마스는 제자들이 필시 유령에 홀린 것은 아닌지 의심하면서 그들이 보다 ‘실증’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물론, 그 속내에는 잔뜩 삐진 심사도 숨겨져 있었을 터다.

 

“주님도 무심하시지. 왜 하필이면 내가 없을 때 나타나시냐고!”

 

이 억하심정이 곧장 예수님께 전달되어서일까. 꼭 한 주일(‘여드레’) 후 토마스가 함께 있을 때 예수님은 다락방에 다시 나타나 주신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눈앞의 그분이 진짜 예수님이심을 이미 오감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즉시 이 실증주의자는 무릎을 꿇어 경배자가 되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이 한방 고백은 마치 9회 말 홈런과 같은 것이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던 베드로의 고백에서 진일보 한 것이었다.

 

 

■ ‘믿는 이’가 되거라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주신 말씀의 백미는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다. 이 문장은 본래 그리스어 원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토마스야, 아피스토스(apistos)가 되지 말고 피스토스(pistos)가 되어라.”

 

여기서 아피스토스는 ‘안 믿는 이’란 뜻이고, 피스토스는 ‘믿는 이’란 뜻이다. 즉, “안 믿는 이가 되지 말고 믿는 이가 되라”는 말씀이었다. 이 원문은 우리에게 무릎을 탁 치는 깨달음을 준다.

 

말씀의 요지는 믿고 안 믿고는 하나하나의 사안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체를 통으로 보는 태도의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믿는 이’가 되기로 선택하고 나면, 모든 것이 믿음의 눈으로 보인다. 이 믿음의 눈으로 보면, 다 축복이고 다 은총이고 다 행복이고 다 잘 된다. 반면 ‘안 믿는 이’의 눈으로 보면 다 불행이고 다 실패고 다 좌절이고 다 불평거리다. 결국, 예수님은 토마스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셈이다.

 

“토마스야, 네가 네 동료들이 전해 준 내 첫 번째 발현 얘기를 믿지 않았던 것은, 그들의 전달이 미흡해서가 아니라 네가 평소 ‘안 믿는 이’(apistos)의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너 그거 고쳐라. ‘믿는 이’(pistos)가 되면 비록 네가 보지 못했어도 내 부활을 진즉 믿었을 테니까.”

 

예수님의 이 심오한 일침을 토마스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그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하는 최고의 신앙고백을 바쳤다. 이쯤에 이르자 예수님은 결정적인 한 수 권고를 평생의 과제로 남겨주신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토마스의 실증주의적 접근법을 인정해 주시면서도 그보다 윗단계인 직관적 믿음에로 초대해 주신 것이다.

 

짐작건대 그 이후 토마스는 와신상담하며 ‘믿는 이’가 되려는 믿음 연습에 돌입했으리라. ‘믿음 연습’을 위한 그의 중얼거림이 그 어떤 기도보다 절절한 기도소리로 환청처럼 들려온다. 

 

부활은 누가 보는가? 믿는 이다.

하느님은 누가 보는가? 믿는 이다.

희망은 누가 보는가? 믿는 이다. 

 

답은 누가 보는가? 믿는 이가 본다.

은총은 누가 보는가? 믿는 이가 본다.

가능성은 누가 보는가? 믿는 이가 본다. 

 

부활은 누가 보는가? 믿는 이다.

….

….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11월 29일, 차동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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