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47 · 끝)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64) - 묵시가, 요한 사도 주님께서 함께하시며 눈물 닦아 주는 ‘희망’ 제시 ■ 사랑받던 제자 이 글로써 ‘성경 속 인물의 기도’ 시리즈가 마감된다. 가톨릭신문 측의 무한 배려와 애독자들의 영적 의리 덕에 여기까지 왔다. 고백하거니와 나는 매번 성령의 감동으로 선정된 인물들의 인간적 고뇌와 깊이 교감하는 은혜를 누렸다. 실존의 막장에서 토해진 탄원의 배냇소리, 생의 흑야에서 두리번거리며 한 줄기 별빛을 더듬던 고독한 시선들, 그리고 홀연 드리워진 ‘그분 영광’에 하염없이 눈물만 번지던 가난한 이의 얼굴들…. 의인이고 죄인이고 없이, 다 내 민낯이다. 그리하여 드러난 것은 오직 하느님의 영광! 그네들을 이담 하늘나라에서 만날 때 서먹서먹하지 않을 만큼 친해져 있다는 행복한 착각에 지금도 빠져있다.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그 희망으로 이제 마지막 인물과 사귈 차례다. 그 이름 요한 사도이다. 요한 묵시록이라는 성경의 대미를 기록한 인물이기에 굳이 ‘마지막’의 까닭을 밝힐 필요는 없으리라. 요한은 미소년이었다. 그가 형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으로부터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는 10대의 풋풋한 소년이었다. 열두 사도 가운데 막둥이였던 그는 “야훼의 은총을 받는다”는 뜻의 ‘요한’답게 예수님의 총애를 받았다. 워낙 어려서 예수님을 따랐기에 애처로워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요한 복음에서 그가 자신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요한 21,7)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저 특은을 내심 자랑스럽게 기억하면서도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겸덕의 발로라고도 볼 수 있겠다. 재미있는 사실은 5세기경부터 그가 ‘미소년’이었다는 점이 과장되어 그의 초상이 무조건 ‘수염 없는’ 꽃미남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반그리스도교적 저술 「다빈치 코드」에서 예수님 오른편에 앉은 요한이 마리아 막달레나로 오해받게 되는 빌미가 된 것이다. 요한은 막내였음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위상을 점하고 있었다. 성령 강림 후 얼마간 베드로가 있는 곳에는 늘 요한 사도가 함께 있었다. 그는 한동안 베드로의 오른팔이었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요한을 교회의 기둥이라고 표현한다.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베드로)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갈라 2,9). 이쯤 되니 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계속 영의정 좌의정 자리를 청하였는지 이해가 간다. 가능성이 있으니까 청탁하려 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야고보와 요한은 서로 운명이 갈린다. 야고보는 사도들 가운데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반면에 요한은 90년대까지 가장 오래 살았다. ■ 천둥의 아들에서 사랑의 사도로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은 똑같이 ‘보아네르게스’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다. ‘천둥의 아들’이라는 뜻의 이 별칭을 얻은 것은 그들의 불뚝 성질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어느 날 예수님 일행이 사마리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려 하는데, 동네 사람들이 길을 막아서서 못 지나가게 했다. 이 꼴을 당한 야고보와 요한은 분기탱천하여 예수님께 이렇게 청한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다가 벼락을 내립시다”(루카 9,54 참조). 이 말에 예수님이 야단을 치신다. “너희들은 보아네르게스야. 천둥의 아들! 그 성질머리로는 큰일을 못하는 법.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이제부터 사랑을 배우거라.” 사랑?! 요한 사도는 이날의 창피를 가슴에 새겨둔다. 그 뒤로부터 사랑의 ‘사’자만 나와도 메모해 두면서 사랑 공부에 몰두한다. 그 결과로 요한 사도는 네 복음서 가운데 유일하게 예수님이 명하신 ‘사랑의 새 계명’을 기록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요한 사도에게 이 ‘새 계명’은 ‘사랑의 혁명’ 대장전격이었다. 그런데, ‘새 계명’이라? 대체 무엇이 새롭단 말인가? 서로 사랑하여라? 이 말씀은 구약에도 있다(레위 19,18 참조). 그렇다면, 대관절 무엇이 새롭다는 말인가? 아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이 부연 말씀에 뭔가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했는가? 이 물음에 요한 사도의 뇌리에는 지난 3년간 예수님의 눈빛, 말투, 마음 씀씀이,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인’(그렇다 바로 그 ‘사마리아인’들)의 비유, 성체성사 제정, 그리고 십자가상 무한 용서로써 몸소 보여주신 원수사랑 등등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으리라. “저런 사랑이라면 ‘완전’, ‘딴판으로’ 새로운 것이다!” 요한 사도가 순간적으로 내렸을 결론은 이제 우리의 깨달음이기도 하다. ■ 희망의 증언 예수님은 다른 모든 사도들에게는 복음을 증거하다가 이윽고 순교하도록 허락하셨지만, 요한 사도만은 끝내 살려 두셨다. 파트모스 섬에서 요한 묵시록을 기록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피로써가 아니라 박해받음으로, 그리고 몸부림치는 희망으로써 동료 사도들의 순교에 동참한 셈이다. 무지막지한 묵시적 용어로 기록된 파트모스 섬에서의 환시는 종국에 희망의 증언으로 귀결된다. 그 가운데 끝까지 신앙에 충실하면서 온갖 시련을 견뎌내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주시는 희망의 약속은,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묵시 21,3-4). 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눈물도,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세상. 묵시록은 그 세상이 도래할 것을 예고한다. 과연 그 나라는 어디 있는가. 물론 죽음 저 너머의 세상이 그런 나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라면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은 너무도 고달픈 천형이 아닐까. 그러기에 예수님은 희망의 단서를 남겨 두셨다. 우리는 방금 말씀 서두에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가 저 모든 것들을 누리는 조건문으로 제시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곧,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실 때, 그런 세상이 임하는 것이다. 그렇다! 주님이 함께 계시면 만사 오케이다. 아니 내가 주님을 떠나지만 않는다면 그 나라는 이미 나와 함께 있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지막 외침은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이 되는 것이다. 유배지 파트모스 섬 해변에서 요한 사도는 어떤 기도를 바쳤을까. 그중 한 소절은 얼핏 따라 바칠 수도 있을 듯하다. 주님과 함께라면, 눈물은 더 이상 서럽지 않네.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죽음도 더 이상 두렵지 않네. 임마누엘 주님 앞에, 더 이상 슬픔도 없네. 주님과 함께라면, 울부짖음은 더 이상 솟지 않네.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괴로움도 더 이상 아프지 않네. 임마누엘 주님 앞에, 온통이 은혜요 감사네.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 이번 호로 ‘차동엽 신부의 신나고 힘나는 신앙’ 연재를 마칩니다. 지금까지 수고해 주신 차동엽 신부님과 애독해 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가톨릭신문, 2015년 12월 27일, 차동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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