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아카데미] 사회에 대한 교회의 역할 인간과 사회 모두를 위해 움직인다 요사이 여러 사회 문제에 교회가 적극 개입하고 있다. 10년 이상 계속되어온 밀양송전탑 반대로 시작해서 핵발전소 반대로, 제주도 강정의 해군기지 반대에서 평화운동으로, 쌍용자동차로 시작해서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차원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런 만큼 교회 안에서 찬성하고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으며, 반대와 거부의 목소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나름대로 일리도 있고 어떤 면에서는 자연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여러 입장 중에서 교회의 사명과 역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특히 교회는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서 개입해야지 구체적인 국가정책이나 이해관계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그러하다. 교회는 윤리와 인간문제의 전문가이므로, 구체적인 사회의 영역에서는 다른 전문가들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과학기술의 영역인 핵발전소를 반대하거나, 구체적인 국가정책인 해군기지를 반대하거나, 이해관계의 영역에 속하는 노동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언뜻 듣기엔 그럴듯하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과학기술이나 국가정책이 한 사회의 문화와 윤리, 그리고 정치경제적 영향과 관계없이 마치도 진공관 안에서 이루어지듯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며 투명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연과학의 역사는 과학기술이 다양한 사회적 영향을 받아 진화하는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과학기술은 한 사회의 가치와 윤리, 자본과 노동의 관계 등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는 것이다. 더욱이 한 국가의 정책은 한 사회의 여러 이해관계들을 조정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특정 이해를 대변하기도 한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만족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우산장수와 짚신장수를 함께 만족시키는 정책은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오늘날 과학기술과 국가정책이 기업과 자본에 의해 영향을 받고, 또 심한 경우에는 기업과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정책은 언론과 미디어에 의해 마치도 모든 구성원을 위한 것인 양 호도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과학기술의 영역이거나 전문적인 정책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전문가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교회가 윤리와 인간 문제의 전문가라는 이유로 사회와 국가의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교회(종교)와 세상(세속) 사이를 갈라놓고 교회가 세상의 일에 관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세속화의 하나이며, 더 나가서는 특정한 이해관계의 입장에서 사회적 공론과 사회 각 분야의 민주적 통제를 부정하는 발상일 뿐이다. 우리가 윤리라고 하는 부분은 개인의 양심과 내면에 관계된 것일 뿐 아니라, 한 공동체의 올바른 규범과 생활방식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윤리는 각 사람이 직접 맺고 있는 기본적인 관계에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러한 사회적인 관계는 법률과 제도, 정치와 정책 등의 구조에 의해 언제나 매개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의 윤리의 핵심인 사랑 역시 “친구나 가족, 소집단에서 맺는 미시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차원의 거시적 관계의 원칙”(베네딕토 16세, 「진리 안의 사랑」 2항)이 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관심은 인간의 참다운 발전과 사회가 인간의 모든 차원을 존중하고 신장시키는 사회로 발전”(성 요한 바오로 2세, 「사회적 관심」 1항)하는 데에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어느 누구도 종교를 개인의 내밀한 영역으로 가두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다. 종교는 국가 사회 생활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말라고, 국가 사회 제도의 안녕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에 대하여 의견을 표명하지 말라고, 그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다.”(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 183항)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과 신학대학 교수를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1월 17일, 이동화 신부(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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