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아카데미] 사회구조와 사회교리 사람을 살리는 구조 변화가 먼저입니다 공관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결심을 한 최초의 계기는 안식일 논쟁(마태 12,14)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노동을 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다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는데, 이 일이 당장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흠 잡혔던 것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주시는 “노동”을 감행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지키고 회복하기 위하여, 적어도 외적으로는 안식일 법 규정을 완전히 뒤집어 엎으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일탈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뿐 아니라 헤로데 당원까지 한통속이 되게 만들었다(마르 3,6). 복음서들은 여러 차례 예수님이 병자들을 만났을 때 측은한 마음이 들었고, 또 병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는 등, 예수님과 병자들의 관계에 대해 전한다. 그러나 적어도 안식일 논쟁에서는 세 복음서 중 어떤 복음서도 손이 오그라든 사람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안식일이라는 사회적 제도와 법규를 둘러싼 갈등을 전해줄 뿐이다. 원래 안식일에 관한 제도와 법률은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이집트의 억압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과 자신들과의 관계, 그리고 자신들 사이의 관계, 더 나가서는 자신들과 우주만물과 맺는 관계를 규정하는 법률이었다. 안식일은 인간이 노동의 고역에서 해방되는 날이고, 안식년은 땅과 자연이 해방되는 해이며, 안식년이 일곱 번이 지나고 난 다음해에는 모든 사회적 관계가 해방되어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는 희년이다. 해방과 회복의 해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안식일은 해방이 아니라 억압의 법 규범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규정이 아니라 죽이는 규정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특히나 아픈 사람, 죄인이라 낙인찍힌 사람, 가난한 사람에겐 더욱 가혹한 법이었다. 이렇게 법과 제도가 한 사회 안에서 굳어지게 되면, 사람들은 옳고 좋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쉽사리 그 규범을 넘어서지 않으려 한다. 그러니 사회의 제도와 법률, 문화 등의 구조들이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가치인 이웃사랑을 방해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사랑의 가치를 증진시키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구조라고 부르는 법률, 제도, 문화 등이 인간관계와 사회관계를 규정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회구조 안에서 영향 받고 그 안에 갇혀있다. 우리가 아무리 착하게 살겠다고, 사랑하며 살겠다고, 정의롭게 살겠다고 다짐해도 우리 사회가 선하고 정의롭게 변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도와 법률이라는 사회구조를 개선하고 쇄신시키는 것 역시 사랑의 실천이요 정의를 위한 투신이 된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애덕의 실천은 자선 행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빈곤문제의 사회적 정치적 차원들에 대처하는 것도 포함”(간추린 사회교리 184항)한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교적 “사랑은 친구나 가족, 소집단에서 맺는 미시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차원의 거시적 관계의 원칙”(베네딕토 16세 「진리 안의 사랑」 2항)이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는 사회구조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며, 가톨릭 사회윤리는 법과 제도를 포함하는 사회구조의 윤리이다. 그리고 사회구조라는 담을 넘어서서 그 담 자체를 바꾸고 고치는 것을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는 흔히 폄하되기는 하지만,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매우 숭고한 소명이고 사랑의 가장 고결한 형태”(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205)이다. *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2월 28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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