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찾아서] 부활, 파스카의 신비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우리는 대지의 생명이 새롭게 움터나는 봄과 함께 부활시기를 맞이합니다.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 신앙 진리의 정수이다.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를 중심 진리로 믿고 실천했으며, 성전(聖傳)이 근본 진리로 전승하였고, 신약성경의 기록으로 확립되어 십자가와 함께 파스카 신비의 핵심 부분으로 가르쳐온 신앙 진리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638항). 부활은 ‘십자가와 함께 파스카 신비의 핵심 부분’입니다. 여기서 ‘파스카’라는 말은 ‘통과하다(보고도 그냥 지나치다)’, ‘넘어가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하느님께서 이집트의 모든 맏아들을 치시면서 양이나 염소의 피가 발린 이스라엘인들의 문은 ‘거르고 지나가신’(탈출 12,23 참조) 사건을 기념하는 축제를 과월절 또는 파스카 축제라고 합니다. 이러한 유다인들의 축제의 이름인 파스카가 그리스도교에 와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곧, 파스카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죽음이 우리를 ‘통과하게’되었고, 우리가 죽음의 심연을 ‘넘어가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생활 : 넘어감 봄이 왔습니다. 계절은 겨울을 지나 봄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넘어감’은 어떤 변화를 전제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서있는 이쪽과 내가 넘어갈 저쪽은 뭔가가 다릅니다. 저쪽으로 넘어가면 뭔가가 변화될 것 같습니다. 넘어간다는 것에는 이쪽과 저쪽 ‘사이’에 뭔가가 있다는 것도 전제합니다. 그것은 어떤 장벽이 될 수도 있고, 깊은 계곡이나 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 사이에 뭔가가 없다면 ‘이쪽’과 ‘저쪽’이라는 개념 자체도 생기지 않습니다. 넘어감이라는 말은 한편 자유를 찾아 베를린 장벽을 넘던 많은 사람을 생각나게 합니다. 넘어감에는 또한 어떤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이 없다면 넘어갈 이유가 없지요. 언젠가 소나기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우산을 쓰다가’ 소나기를 피해서 잠시 나무 밑에 서있었는데 무척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서있는 나무 오른편에는 비가 오고 있었는데, 왼편에는 비가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왠지 비가 내리는 이쪽과 비가 내리지 않는 저쪽 사이에 서있는 그 나무가, 그리고 나 자신이 무척 신비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이제 ‘우산을 접고’ 비가 오지 않는 길로 걸어갔습니다. 교리 : 부활 ‘소생’이나 ‘부활’이라는 말은 모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소생’의 관점에서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당신이 부활 전에 야이로의 딸, 나인의 젊은이, 라자로 등을 다시 살리신 경우처럼 지상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사실들은 기적적인 사건들이었지만 이 기적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능으로 지상의 ‘정상적인’ 삶을 되찾았을 뿐이었다. 때가 되면 그들은 다시 죽게 될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646항). 죽었다가 지상의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오는 것, 그러다가 다시 죽게 되는 것을 소생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 일어난 부활 사건은 이와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부활하신 당신의 육신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상태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다른 생명의 세계로 넘어가신다. 예수님의 몸은 부활을 통해서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진다. 예수님의 몸은 그 영광스러운 상태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646항). 예수님의 부활은 ‘다시는 죽지 않는 되살아남’이며 ‘죽음의 상태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다른 생명의 세계로 넘어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파스카’, 곧 넘어감입니다. 그래서 라틴계 언어를 쓰는 나라에서는 부활절을 ‘파스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살아계십니다.’ 하늘에 오르시어 아버지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시고, 지상에서 죽을 운명에 놓인 사람들이 죽음을 넘어 참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말씀 : 파스카의 신비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기에,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만의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보증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0-22). 우리가 누리게 될 부활은 바로 ‘참생명의 세계로 넘어감’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42.44).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파스카의 신비에 동참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파스카 양의 피가 묻은 문설주 안에서 죽음으로부터 보호받게 되고, 죽음에서 참생명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1코린 5,7-8). 우리가 파스카의 신비에 동참하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새 반죽이 되어 순결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야합니다. 앞날의 파스카를 준비하며 오늘의 파스카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파스카의 신비 안에서 하늘의 인간이신 예수님을 따라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1코린 15,47.49).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부활은 파스카, 곧 ‘넘어감’의 신비입니다. 부활이 우리 신앙의 정수라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무엇보다 ‘참생명으로의 넘어감’에 믿음과 희망을 두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참생명으로 넘어가는 삶이며 하늘의 인간이 되어가는 삶입니다. - 참생명의 삶을 믿고 희망합시다. 거기에는 참행복이 있습니다. 우리의 부활은 단순한 소생이 아니라 바로 파스카입니다. -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를 생각합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쪽과 저쪽 사이에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참생명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 ‘하늘의 인간’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순결하고 진실한 삶으로 ‘누룩 없는 빵’이 됩시다. 오늘의 파스카를 살아가면 우리는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날 것입니다. * 고성균 요한 세례자 - 도미니코수도회 수사. 현재 수도회 지원기 양성담당자 소임을 맡고 있다. 단순하고 즐겁게 형제들과 어울려 살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에 작은 도움이 되고자 노력한다. [경향잡지, 2016년 4월호, 고성균 요한 세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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