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아카데미] 부자나라 가난한 사람들
열심히 일하는데 왜 가난한가 외국여행이라도 한번 가보면 세계 주요 도시의 중심에서 우리나라 기업 광고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길거리엔 우리나라의 자동차들이 돌아다니고, 외국인의 손에 우리 기업의 전자제품이 들려 있다. 마음 졸였던 외국 여행이 뿌듯함으로 채워진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나라는 세계 10위 권의 무역과 경제 대국이다. 그러나 이런 뿌듯함이 오래가지 못하는 것은 당장 우리의 현실을 보면 기가 막히기 때문이다. 생계형 범죄는 이틀이 멀다하고 방송 매체에 올라오고 있으며, 젊은 친구들은 기가 죽어 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신 어르신들은 만성질환과 가난, 고독과 싸우고 있다. 부자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왜 그럴까? 부자나라의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무엇보다 먼저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지금 당장 일하지 못하고 소득이 없는 어르신들, 그리고 아직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이들이 가난하다. 그런 어르신들을 모시고 있거나, 아직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이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부모 세대도 가난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에 국가가 좀 더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한다. 일반적인 우리 시민들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과 부조에 나선다고 생각하고 세금을 더 내는 것도 생각해볼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다. 더 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하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은 노동자들의 소득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재벌기업과 공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노동자들의 소득이 많지 않고, 더구나 우리나라 노동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소득 역시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빠는 물론이고 엄마와 대학 다니는 큰 자녀가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네 명의 가족이 겨우 먹고 살 만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신앙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현실의 경제적 법칙은 신앙과는 관계없다고 여기며, 이런 비인간적 경제 법칙에 우리를 내맡겨야 할까? 그렇지 않다. 자연과 우주의 법칙도 조금씩 알아가면서 인류는 그 나름대로 자연에 순응하기도 하고 대처하고 극복하기도 하며 살아왔다. 그냥 경제법칙대로 따라가자는 말은 경제적 기득권자들의 자기 정당화에 불과하다. 신앙인들은 교회가 제시하는 “인간에게 봉사하는 경제”(「사목헌장」 64항)를 만들어야 할 윤리적 도덕적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 시작은 인간의 노동을 우선(「사목헌장」 67항)에 두는 제도와 정책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부동산(토지)과 기업 이윤(자본)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제도와 정책을 펴오지 않았는가. 그런 제도와 정책이 이제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야말로 인간의 노동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마침 독일에서 좋은 바람이 불어온다.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자율적이고 공동의 결정을 존중하는 원칙을 깨고 작년 1월에 시간당 1만300원(8.5유로) 정도의 최저임금을 도입한 결과,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일자리가 늘어나서 실업률이 감소하고 노동자들의 평균 소득이 증가했으며 노동자 사이의 임금 격차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꽤 괜찮은 수준의 최저임금이 가난한 노동자들의 긴급한 필요를 해소할 수 있게 만들었고, 이는 사회 전체의 적절한 소비를 증가시켰으며, 그것에 따라서 일자리도 서서히 늘기 시작한 것이다. 소비 진작을 위해서 부동산 취득세를 깎아준다든지 멀쩡한 날을 임시공휴일로 만드는 요란을 피울 일이 아니다. 경제 문제도 그러하고 사회의 모든 문제들이 그러한데, 가장 깊은 밑바닥에는 경제 “법칙”이나 사회의 “법칙”의 문제보다는 윤리의 문제가 깔려 있다. 제도와 정책, 더 넓게는 정치가 하는 일은 얽혀 있는 이해관계 속에서 어떤 결정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지를 판단해야 하는 일이다. 소수의 이해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서는 얽힌 것이 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경제와 사회는 법칙이나 학문의 문제이기에 앞서 윤리의 문제다.
*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6월 5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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