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아카데미] 기도와 단식과 자선
“아버지의 나라가 땅에서도…” 가톨릭 사회교리의 일차적 관심은 인간 사회의 질서와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는 복음과 신앙의 빛에 비추어, 그리고 동시에 사회교리의 도움을 받아서 정치와 경제의 질서, 사회와 공동체의 질서, 제도와 법률 등의 질서와 구조가 복음에 부합하는지를 규명하고 윤리적 판단을 한다. 그러나 현실의 질서에 따라서 살아갈지 또는 그 질서를 복음의 빛에 비추어 쇄신하며 살아갈지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맡겨져 있고, 더 정확히는 우리 모두의 근본적인 회심에 맡겨져 있다. 오늘날 인간생활의 모든 면이 현실 질서와 구조에 갇혀있기는 하지만, 인간이 가진 자유의 능력은 그 구조를 넘어서 살 수 있도록 한다. 더욱이 이러한 모든 질서가 인간이 역사 안에서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런 질서를 더욱 인간적이고 복음적인 질서로 변형시키는 것 역시 인간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구조 속에 살지만 그것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쇄신시키며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소명이며 사회적 책임이다. 성경과 그리스도교 전통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이웃을 위해서나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소명과 책임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단식하며 자선’하라고 가르쳐왔다. 무엇보다도 기도의 본질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마태 6,33)을 청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듯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마태 6,10) 청해야 한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죄와 악의 구조(요한 바오로 2세, 사회적 관심 36항)는 하느님의 도우시는 은총 없이는 극복하기 힘들다. 오늘날 ‘소비사회’라고 일컬어지는 풍요로운 후기산업사회는 광고와 마케팅 기술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인간의 욕망과 환상을 부추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살기보다는 자신의 소비와 소유를 통해서 자신 자신을 생각하고 평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물질문명 속에서 단식한다는 것은 단순히 끼니를 굶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참다운 단식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자신이 변화”(로마서 12,2)되는 것이다. 그러니 단식은 하느님이 주신 자기 자신을 되찾고 그 모습을 지키기 위해,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허상을 경계하고 울타리를 치라는 뜻이다. 이런 울타리 없이는 우리의 투신과 헌신도 쉽사리 권력과 향락 아래 무너지거나 그것들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자선은 단순히 자신의 남는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도 부족한 것일지라도 기꺼이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더 나가서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친구나 가족, 소집단에서 맺는 미시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차원의 거시적 관계의 원칙”(베네딕토 16세, 진리 안의 사랑, 2항)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참다운 자선은 자신의 재화를 나누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시간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와 공동체의 질서, 경제적 제도와 구조, 그리고 정치적 질서를 쇄신시키고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하는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이다. 자선은 소규모의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회 전체의 질서와 구조가 복음적이게 하는 모든 노력을 뜻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자선은 사회적이고 또한 정치적이다. 그러기에 “정치는 흔히 폄하되기는 하지만,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매우 숭고한 소명이고 사랑의 가장 고결한 형태”(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 205항)인 것이다.
*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6월 26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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