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아카데미] 정치와 종교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움직임 일러스트 조영남유신과 군사독재 시절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교회가 정부에 대해 비판이라도 하면, 어떤 이들은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을 들먹이며 교회를 비판한다. 정치와 종교, 정부와 교회는 분리되어 있으니 서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의견이나 생각에 간섭할 바는 아니지만, 그들의 정교분리에 대한 이해는 올바르지 못하다. 정치와 종교의 관계를 살펴보자면, 313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칙령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칙령으로 그리스도교는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되고, 로마제국의 사실상의 국교가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국교화는 현대에까지 이어졌으며, 이태리와 스페인에서 가톨릭이 국교에서 벗어나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며 영국은 아직도 성공회를 국교로 삼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고려 때에는 불교가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국교였다. 유교가 종교가 아니라는 의견도 있으나, 조선의 국왕은 ‘종묘’와 ‘사직’의 제사를 주관한 사제였음은 분명하다. 이런 맥락 위에서 정교분리의 헌법적 원칙이 나오게 된다. 국교 금지를 비롯한 헌법상 종교규정은 미국의 수정헌법에서 시작되어 다른 나라로 영향을 끼쳤다. 미국 헌법의 종교규정은 종교 자유와 국교 금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우리나라 헌법 역시 마찬가지이다. 종교의 자유는 내면적인 신앙의 자유와 외면적인 종교적 행위의 자유까지 포함한다. 예배, 종교적 집회와 결사, 종교교육, 선교 등의 자유가 종교 행위의 자유에 속한다. 미국 헌법과는 달리 우리 헌법에 명시된 ‘종교와 정치의 분리’는 적극적인 면에서는 국교의 금지 또는 국가에 의한 종교 활동을 금지한다는 뜻이고, 소극적으로 보면 국가에 의한 특정 종교의 우대 또는 차별 금지를 뜻한다. 그러니 정교분리를 상호 불간섭으로 이해하자면, 정부에 대한 비판은 물론이거니와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나 구국법회 같은 것도 이 원리에 어긋나고 위헌이 된다. 좀 더 근본적으로 보자면 ‘정교분리’의 원칙이 뜻하는 것은 종교적 영역에 있어서 국가 권력의 제한이다. 내면적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나 외면적 종교 행위에 있어서 국가 권력이 시민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특정 종교를 국가 권력이 자신의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국교로 삼은 나라들 사이의 종교 전쟁과 오늘날의 종교 다원적 현실에 대한 성찰에서 나온 원칙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교분리의 원칙을 가톨릭 사회교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엇보다 먼저 보조성의 원리를 뜻하는 것이다. 신앙과 종교의 영역에 있어 국가 권력이 보조적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뜻이고, 그런 의미에서 국가 권력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당연히 정치와 종교, 또는 국가와 교회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나 국가와 교회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들의 더 좋은 삶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와 정부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으로서 신앙 행위를 종교의 정치개입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교회의 사목자들은 인간 생활과 관련되는 모든 것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권리가 있다. 복음화 사명은 모든 인간 존재의 전인적 진보를 포함하고 또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종교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 하고 오로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준비하기 위해서만 종교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복음의 기쁨」 182항). 더불어 “모든 그리스도인은, 또 사목자들은 더 나은 세계의 건설에 진력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 교회의 사회교리는 무엇보다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제안을 하며 개혁적인 활동방향을 가리켜준다”(183항)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 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7월 3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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