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아카데미] 사회교리와 평신도의 소명
평신도는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 우리 주변엔 참으로 거룩하고 헌신적인 평신도들이 많다. 매일 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매주 레지오 마리애도 물론이고 소공동체 모임까지 열심이다. 본당에 행사가 있을 때면 아무 말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평소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빛나지 않는 일에도 열심이다. 한국교회의 초창기에, 사제가 없을 때는 사제 영입을 위해 온 힘을 아끼지 않았고, 사제가 있더라도 많지 않았던 그 시절 평신도가 공소회장으로, 선교사로 스스로 공동체의 일을 떠맡고 신앙을 전파했다. 평신도야말로 한국교회를 일구어낸 일꾼이었고, 우리 교회의 튼튼한 대들보이다. 그러나 이런 훌륭한 유산에도 불구하고, 요사이에는 일부이긴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신심과 세속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평신도들이 없지는 않은 듯하다. 개인적인 신심과 세속적인 신앙생활은 ‘분리’를 특징으로 한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기억하는 사람들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한 번은 생각해볼 일이다. 기도로 하느님께 청하는 우리의 바람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많은 경우 하느님께 청하는 우리의 바람과 세상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루카 16,26 참조) 있어 서로를 분리하고 있다. 신앙과 세상살이 사이 역시 건너갈 수도 건너올 수도 없는 깊은 분리가 있는 듯하다. 어떤 면에서는 복음의 빛으로 세상살이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살이의 관점에서 신앙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래서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혹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신앙이 달리 해석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이런 현상은 비단 한국의 가톨릭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반적인 종교현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종교의 교리가 세속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을 상실했다는 측면에서 종교사회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종교의 세속화라고 부른다. 뿐만 아니라, 종교와 교리가 그 특성을 잃어버리고 마치 시장에서의 상품같이 변해버렸다는 면에서 종교의 시장화(marketization)라고도 한다. 오늘날 종교는 마치 소비자가 여러 냉장고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과 비슷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오늘날 이러한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있다. 예수님은 분리되고 갈라진 세상을 일치시키고자 했다. 자기 동족만을 이웃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카 10,29-37)를 통해 이웃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더 나아가서 사랑해야 할 이웃의 범위는 “원수”(마태 5,44)까지 넓혀진다. 하느님의 현존은 세상과 분리된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체험되는 것이 아니다(요한 4,21).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 분리시키지 않으시고, 오히려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일치(마태 25장)시켰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찾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세상과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지나칠 수 없는 이유다. 특별히 평신도들은 세상 한 가운데서 하느님께 불리움 받은 사람들이다. 평신도는 자신의 직업과 노동, 가정과 인간관계, 연구와 과학 활동, 사회생활과 경제 활동, 그리고 정치적 선택을 통해서 세상을 복음의 요구대로 변화시키는 사람이다. 평신도는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무실에서, 공장에서, 노동조합에서, 법인 이사회에서 하느님의 거룩함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자기 손해에도 불구하고 정의롭고 공정한 선택으로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내고, 아픈 이웃의 이야기를 열린 마음으로 들어주고 그들을 대변하고 옹호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한다. 세상의 모두를 위해서 그리고 특히 약자들을 위해서 기도함으로써 하느님의 거룩함을 드러낸다. 사실 평신도야말로 세상의 소금이며, 사회교리는 바로 그런 평신도들을 위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신학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8월 14일, 이동화 신부(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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