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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앙교리: 예수님의 수난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10-08 조회수6,357 추천수0

[공부합시다! 신앙교리] 예수님의 수난 (1)

 

 

하느님의 구원계획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죽음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신 사건은 시간 속에서 우연히 생겨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사도가 성령강림날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에게,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그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신 것이라고 설명한 것처럼(사도 2,23), 예수님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바오로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21) 라고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 때문에 당신 자신을 성부 하느님께 바치셨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자의식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로서 겪으실 고난에 대하여 분명한 자의식을 가지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시점은 당신의 파스카 전에, 즉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기 전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26)

 

복음은, 그리스도께서는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으셨음”(마르 8,31)을,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임”(마태 20,19)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을 비롯한 유다인들의 반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군중의 환영도 받으셨지만, 특히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에게서 반대를 받으셨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어기셨다는 이유로 그들로부터 반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율법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5,19)

 

이러하신 예수님이시니, 그분이 딱히 율법을 어기셨다고 할 것이 없는데도, 종교지도자들에게는 그런 예수님의 자유스런 행동과 말씀이 거슬렸던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하든 트집을 잡아 예수님을 모함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 거슬린 예수님의 행동은, 그분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는 것, 그러느라고 단식과 기도를 소홀히 했다는 것,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는 것,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주었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웃의 병을 고치는 일이나, 하느님께 예배하는 일 등을 위해서는 안식일 규정을 어겨도 괜찮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 예배하는 일이라는 것은,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마태 12,5)는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안식일 규정을 준수하는 것보다 하느님에 대한 봉사가 우선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시고 난 후에도, 당신이 하느님 행세를 한다는 비난을 유다인들로부터 받으신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런 엄청난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당신이 유다인들의 눈에 어디까지나 사람으로 보이시면서도 감히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그 유다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유다인들과 성전에 대한 갈등을 빚으면서 이런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먼저 성전 정화 사건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예수님께는 성전이 당신 아버지 하느님의 거처이고 기도하는 집인데, 사람들이 성전 앞뜰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든 것에 대해서 분개하셨던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요한 2,18) 하고 말하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이에 유다인들은 이렇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헤로데 대왕이 46년간이나 걸려서 지은 성전을 자기가 뭐라고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니, 말이 되는가? 자신이 하느님이란 말인가!”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으로 사람들의 미움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 직전에 그 찬란한 건물의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 자리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고 예고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실 때였습니다. 지나가던 자들이 머리를 흔들어 대며 예수님을 모독하였는데, 이렇게 말했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 27,40) “네가 하느님의 아들도 아니면서 왜 그런 엄청난 말을 한 것이냐?” 라는 식으로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과 예루살렘 성전 때문에 예수님을 반대하였지만, 그들에게 진정으로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죄인들을 용서해주시는 예수님의 행동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하느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은 사람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으셨다고 해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 모두가 예수님을 반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리사이였던 ‘니코데모’나 고관이었던 ‘아리마태아사람 요셉’ 등은 예수님의 숨은 제자들과 같은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지도자들 가운데에서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바리사이들 때문에 회당에서 내쫓길까 두려워 그것을 고백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보다 사람에게서 받는 영광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다.”(12,42.43)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에 대한 책임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집단적 책임을 유다인들에게 지울 수 없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재판에 대한 책임을 예루살렘의 유다인 전체에게 지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시간과 공간에 속한 다른 유다인들에게까지 그 책임을 확대할 수도 없다고 부연하고 있습니다.(597항 참조)

 

이제 우리 교회는 우리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께 미친다는 점을 생각하여, 예수님의 처형에 대한 가장 중대한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고 있습니다.(598항 참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것은 우리의 죄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레지오단원 여러분!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죄에 다시 떨어진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처형하는 잘못을 다시 범하게 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생각하도록 합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10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성당 주임, 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공부합시다! 신앙교리] 예수님의 수난 (2)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고 수난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고 할 것입니까?

 

우리 교회는 죄인인 인간 모두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모든 죄인이 그리스도 수난의 장본인이었다.” “죄인들 자신이 하느님이신 구세주께서 겪으신 모든 고난의 장본인이었고 그 도구였다.”(598항)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전의 교회의 경우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 죽음의 책임을 돌리는 일이 흔했습니다. 그런데 공의회 이후 우리 교회는 180도로 변한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처형에 대한 가장 중대한 책임은 유다인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가톨릭교회교리서는, 타락하고 악에 빠지는 사람의 죄가 유다인들의 죄보다 더 크다는 견해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것은 우리의 죄인 만큼, 타락과 악에 빠지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마음 안에서, 그들 안에 계신 하느님의 아들을 거듭 십자가에 못 박고 욕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우리의 죄가 유다인들의 죄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598항)고 한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는 우리들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셨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죄를 지으면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죄에 쉽게 기울어지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나라고 한다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다음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마귀들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악습과 죄를 즐김으로써 마귀들과 함께 주님을 못 박았으며, 지금도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권고, 5,3)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겪으신 수난과 죽음을 피하실 수도 있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자원하여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원하셨기에 수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셨다!” 이는 참 중요한 관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신 일은 어쩔 수 없이 당하신 것이 아니었고, 혹은 불행한 상황들 때문에 생겨난 우연한 결과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미사경문에서의 “스스로 원하신 죽음이 오자” 라는 대목은 예수님 죽음의 자발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 열두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던 중에, 자신을 자유로이 하느님께 바치신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찬을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성부께 드리는 자발적인 봉헌의 기념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빵과 포도주를 손에 드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예수님을 박해한 사람들의 역할

 

가톨릭교회교리서에 의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면서도 사람들이 저지른 죄악이 그 원인이 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신비에 속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넘겨준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미리 써 놓으신 각본을 수동적으로 실행에 옮긴 것은 아니다.”(599항) 그러면서 교리서는, 하느님께는 시간의 모든 순간이 실제적으로 현재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이러한 계획에는 당신의 은총에 대한 각 사람의 자유로운 응답도 포함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600항)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에 각 사람의 자유로운 응답이 포함된다는 교리서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나의 응답이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에는 헤로데와 본시오 빌라도 등의 행동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교리서는 헤로데와 빌라도의 무지한 행동을 허락하시며 그들을 당신 구원계획의 도구로 쓰셨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들의 무지에서 나온 행동을 허락하셨다.”(600항)

 

 

수난하고 돌아가시려고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강생의) 이유가 죄인들의 구속(속량)에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생애 전체는 성부의 구원하시는 사랑의 계획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원의로 가득 차 있다.”(607항) 예수님은 오직 인간을 사랑하시어 구원하고자 하신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요한 12,2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 18,11)

 

이렇게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은, 결국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수난하고 돌아가시기 위해 강생하신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수난하고 죽으신 예수님

 

“이 끝없는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속량적, 배상적, 속죄적 그리고 보상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생명을 제물로 바치실 때 우리 모두를 인식하고 사랑하셨다.”(가톨릭교회교리서, 616항) 이렇게 가톨릭교회교리서에 의하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곧 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엄청난 고통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제사가 됩니다. 교회가 드리는 매일의 미사가 세상만민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기념하고 재현하는 것이고, 또 새롭게 현재화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미사가 계속 봉헌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봉헌에 사도들도 포함시키시고, 그들에게 이를 계속할 것을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레지오 단원 여러분, 우리들을 위한 예수님의 수난에 감사드리며, 그분의 구원하시는 사랑에 기쁘게 응답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11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성당 주임, 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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