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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앙교리: 나의 주인이신 주님께 대한 신앙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01-06 조회수3,585 추천수0

[공부합시다! 신앙교리] 나의 주인이신 주님께 대한 신앙

 

 

하느님에 대한 물음은 신앙의 물음

 

‘하느님’에 대한 물음은 곧 ‘하느님은 존재하시는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이 물음에 대하여 신학(神學)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은 계신다’라고 대답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하느님은 없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즉 무신론자(無神論者)들과 유물론자(唯物論者)들에게 하느님은 ‘인간이 지어낸 개념’에 불과한 것이고, 그들에게 하느님이 계신다고 하는 종교는 ‘인간에게 방해가 되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영혼이나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물질뿐인 까닭입니다. 그런가하면 범신론자(汎神論者)와 만유재신론자(萬有在神論者)들은 하느님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자연이 곧 하느님이고, 우주 전체, 혹은 우주의 일부가 하느님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처럼 하느님의 존재를 긍정해도 아직 남아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은 ‘어떤 존재이신가’, ‘어떤 분이신가’ 하는 문제입니다. ‘나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 하느님을 신앙하는 나에게 가장 결정적인 물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덧붙여 하느님은 ‘나의 모든 것인가’, ‘나는 하느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역시 중요한 물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결국 내가 믿고 따르는 하느님께 대한 나의 신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계시와 그분께 대한 신앙

 

하느님이란 개념에 대한 물음은 결국 신앙에 대한 물음으로 귀결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먼저 하느님 편에서의 계시가 있어서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천주교는 계시의 종교인데, 특히 불교와 큰 차이가 이 계시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본질은 인간 자신의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노력으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스스로 인간과 인간의 사고에 자신을 열어 놓아야 가능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을 ‘계시’(啓示, revelatio)라고 말합니다. 계시는 ‘가린 것, 덮개를 벗기다’, ‘커튼을 열어젖히다’라는 뜻을 지닌 말(라틴어로 revelare라는 동사)에서 나온 것으로, 우리 사람의 힘으로는 알 수가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셔서 알게 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신앙’(信仰, fides)은 절대자를 믿고 따르며 교의(敎義)를 받들어 지키는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는 하느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계시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오는 길이라면, 신앙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하셨는데, 그분께 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계시에 대한 인격적인 응답인 신앙

 

신앙은 하느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인 응답을 말합니다. 결국 우리 인간이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나아가 그분과 일치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하는 기본자세가 믿음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은 인간이 하느님과 맺고 있는 인격적인 관계와, 인간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기본자세를 드러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인간의 눈으로는 볼0 수 없는 하느님을 믿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잘 믿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하느님을 잘 알기 위해서 우선 그분을 잘 믿어야 할 필요가 있음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교리를 잘 알아야 한다고 해서, 마치 우리 신앙이 순전히 이론의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우리 신앙은 단순히 이론만이 아니고, 시간 안에서 이루어진 역사적인 사건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며, 살아있는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생겨난 까닭입니다.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신앙

 

“저는 하느님을 믿나이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결정짓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응답을 어떻게 드리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민수기에 나오는 ‘구리뱀의 상징’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민수기 21장 9절에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뱀에게 물린 사람에게 왜 하필이면 뱀을 쳐다보아야 살아날 것이라고 하신 것일까요? 왜 꼭 뱀이어야 했느냐는 것입니다. 비둘기나 사슴, 혹은 노루가 아니라 끔찍한 뱀을 다시 쳐다봐야 했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믿는 사람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즉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보면 나을지도 모른다는 인간적인 판단 없이, 오직 당신 약속의 말씀하나에만 의지하여, 곧 당신께 대한 신앙 하나로만 ? 다시는 쳐다보기도 싫은 ? 뱀을 용기를 내어 쳐다보는 사람만이 치유되길 원하신 게 아닐까요?

 

이렇게 구리뱀의 상징 이야기에서처럼 신앙은 우리 인간을 살리는 힘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나의 신앙은 곧 나를 살리는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주인이신 하느님

 

하느님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하느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은 나의 주인이시고, 나는 하느님의 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태 6,24 이하)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종과 주인의 관계를 가지고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를테면 주인과 종의 비유, 탈랜트의 비유,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등에서 그러하셨습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하시면서 우리를 하느님의 종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레지오마리애 단원 여러분! ‘주님’이란 단어는 원래 ‘주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이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하느님을 주인으로 알고 받드는, 곧 하느님을 공경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인이신 하느님의 종답게 하느님의 뜻을 찾고 헤아리며,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착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1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성당 주임, 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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