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찾아서] 세례성사 삶에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특별히 기억하는 중요한 날이 있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이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생일과 남녀가 부부로 평생가약을 맺은 결혼기념일이다. 또한 설이나 한가위와 같이 흩어졌던 가족들이 모여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명절이 있고, 각 나라마다 특별한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과 축제일도 있다. 이처럼 특별한 날은 특별한 숫자와 연관되어 꼭 그날에 기념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 그런데 사실 기억하는 많은 날 가운데 우리가 신자로서 특별히 기억해야 하는 날이 있다. 바로 자신이 세례받은 날이다. 과연 자기가 세례받은 날을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세례를 준 사제나 대부모의 이름은 그래도 기억하지만 자신이 세례받은 날이 며칠인지 정확히 기억하는 이들은 드물다. 특히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신이 세례받은 날을 기억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부모의 일방적 결정(?)으로 세례받은 것을 나중에 알고 억울해하는 이들도 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세례받던 순간을 고백록에서 이렇게 회상하였다. “당신 교회에서 아름답게 울려 나오는 송가와 찬미가에 몹시도 감격하여 저는 얼마나 울었더이까? 그 소리는 제 귀에 스며들고 진리는 제 마음 안 속속들이 배어 경건의 정이 타오르며 눈물이 쏟아져 흐르며 이와 더불어 저는 행복했던 것입니다”(「고백록」 9.6.14). 우리가 세례받은 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처럼 세례의 감동이 절실하지도, 썩 행복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다가가기 사실 우리는 굳이 세례성사를 받지 않더라도 살아가면서 가슴 뜨거운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며,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의 성전으로 새로이 태어나게 할 수 없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279항 참조). 그리스도교 생활의 기초이며, 성령 안에 머무는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다른 성사들로 가는 길인(가톨릭교회 교리서, 1213항 참조) 세례성사만이 오직 우리의 모든 원죄와 본죄를 용서받게 한다. 출생 없이는 우리의 자연적인 삶이 시작될 수 없듯이 우리의 초자연적인 삶은 세례 없이는 진행될 수 없다. 한편으로 교회는 구원을 위하여 세례가 꼭 필요하다고 가르치지만(가톨릭교회 교리서, 1257항 참조), 세례를 받지 않았으나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세례의 효과를 낳는다고 말한다. 이를 ‘혈세’(血洗)와 ‘화세’(火洗)라고 표현한다. 혈세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순교를 당했으나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받는 세례를 말하며, 화세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지녔으나 세례받을 조건이 되지 않을 때,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죽은 사람도 세례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가르침이다. 또한 세례받기 전에 죽은 예비신자들도 죄에 대한 회개와 사랑을 동반한 세례를 받고자 했다면 그들도 구원을 받게 된다고 가르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258-1259항 참조). 더 나아가 교회는 비록 자기 뜻과는 관계없이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도 양심적으로 하느님을 찾을 때 구원받을 수 있다고 고백한다. 이는 분명 구원되려면 세례가 꼭 필요하지만 구원의 여부는 하느님께 달린 것이기에 인간인 우리가 단정할 수 없다는 가르침에 기초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257항 참조). 세례성사는 주교와 신부, 부제가 정규 집전자이다. 그러나 부득이한 경우에는 합당한 의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적법하게 세례를 줄 수 있다. 이렇게 정상적인 경우가 아닌 비상시에 주어지는 세례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평신도 등 비정규 집전자가 주는 임종세례 또는 대세(代洗)이다. 그러나 대세자가 다른 성사를 받으려면 ‘세례 보충 예식’을 받아야 한다. 마치 유아 세례를 받은 사람이 첫영성체를 하려면 교리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이 보충 예식을 받아야만 다른 성사를 받을 완전한 자격을 갖추게 된다. 살펴보기 세례성사는 신앙의 성사다. 세례를 받으려면 완전하고 성숙한 신앙이 아니라 계속 발전할 수 있는 신앙이 필요하고(가톨릭교회 교리서, 1253항 참조), 세례성사를 받고 난 뒤에는 신앙을 잘 가꾸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신학생 시절 군생활을 하면서 군종병으로 사단 성당에 잠시 지낸 적이 있다. 한번은 군종신부님이 출타 중이셨는데 어떤 아주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분은 자신의 아들이 우리 군인성당에 소속되어 있는 사단에서 근무했는데,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지만 지금 군 교도소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급하게 군종신부님과 통화하기를 원하셨다. 나는 여기까지 듣고 ‘아. 이분께서 군종신부님의 힘을 빌려 당신 아들을 출옥시키고 싶으신가 보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어지는 그분의 말씀은 나를 너무도 부끄럽게 만들었다. 군종신부님께서 지금 출타 중이시고 혹시 남기실 말씀을 하시라는 퉁명스러운 나의 응대에 그분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신부님이 돌아오시면 저희 아들 군 교도소에 있는 동안 제발 신앙을 잃지 않게 도와주시라고 전해주세요.’ 그 어머니는 아들이 좀 더 편하게 살기를 바라셨던 것이 아니라, 세례 때 받은 신앙을 잃지 않기를 바라셨다. 그 어머니는 아들이 자신의 아들로 남아있기보다 주님의 아들로 남아있기를 더 바라셨다. 전화를 끊고 그분의 깊은 신앙에 명색이 신학생이었던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졌다. 세례의 은총이 효과를 내려면 부모의 도움도 중요하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255항 참조). 또 교회 공동체 전체는 우리가 세례 때 받은 은총을 키워주고 지켜줄 책임이 있다. 결심하기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세례성사와 관련하여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아무도 혼자서 세례성사를 거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례를 희망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마에 물을 부어줄 사람이 꼭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셨다(마태 28,19 참조). 이 말씀 이후로 교회는 언제나 세례를 베풀어왔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고, 그렇게 세례를 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 지금까지 지속되어 왔다. 세례성사는 청하고 베푸는 과정이다. 청하지 않는데 베풀 수 없으며, 베풀지 않으면 성사를 받을 수 없다. 세례성사 안에는 이처럼 형제적 사랑의 행위와 교회의 자녀가 되는 행위가 어우러져 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 백성이 되어 예언자직, 왕직, 사제직에 참여한다. 곧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형제들과 함께 사제직의 소명을 나누어 받고,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되어, 봉사하는 소명을 실천하면서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잠시 내 방을 둘러보았다. 학위증서나 성품성사 때 받은 교황 축복장, 그리고 지인으로부터 축일 때 선물받은 성구액자는 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세례받은 증명서는 없다. 모든 증명서의 기초가 되는 세례증명서가 없는 것이다. 마치 세례는 기억하지 않고, 세례 때문에 받은 전리품만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올해가 더 가기 전에 ‘세례증명서’를 액자에 담아 걸어놓아야겠다. * 박종주 베드로 - 부산교구 신부. 오랫동안 신학교에서 교리교육을 가르쳤고 지금은 부산 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장으로 일하며 차별화된 가톨릭 평생교육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7년 3월호, 박종주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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