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부와 함께 읽는 가톨릭 사회교리서 『두캣(Ducat)』 유일하고 무한한 가치, 제3장 인간의 인격 서기 1세기경의 내과의사 첼수스는 이집트 범죄자들을 상대로 했던 인체실험을 정당화하려고 이렇게 말합니다. “소수의 범죄자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은, 세세대대로 선량한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이득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잔인하다고만 볼 수 없다.” 소수의 희생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면 괜찮은 것이 아니냐는 논리는 첼수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악행을 정당화하는 논리였습니다. 의학의 영역 밖에서도 소수를 희생해서 대의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언제나 있었는데, 그 ‘희생당해야할 소수’는 숫자와 관계없이 언제나 약자의 몫이었지요. 약자이기 때문에 희생을 강요당하던 사람들은 실로 다양했습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들이 그러했고(2013년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아직도 우리나라 여성들의 임금은 남성 대비 64%에 그칩니다.), 유색인종은 이른바 선진국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삶을 강요당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전 세계 1억 6천만이 넘는 어린이들이 커피농장, 코코아 농장에서 하루 1달러도 안 되는 돈에 노동을 착취당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위험하고 힘든 일들은 외주업체를 통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몫이 되어 버렸지요. 농민들은 어떻습니까. 일 년 벼농사를 지어봐야 한 가마니에 15만원을 못 받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부당한 일들은 ‘전체를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혹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됩니다. 가톨릭 사회교리서 『두캣(Docat)』의 제3장은 ‘유일하고 무한한 가치’라는 제목을 달고 인간의 인격이 지닌 존엄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유일무이한 존재, 다른 무엇을 위해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 까닭은 “하느님이 유일한 인격으로 원하셨던 인간을 사랑으로 창조하셨고, 더 큰 사랑으로 구원하셨기 때문”(54항)입니다. 하느님께서 그토록 사랑해서 창조하시고 돌보시는 존재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어떤 목적을 위해서 쓰고 버릴 수단으로 대접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다른 재능을 지녔거나 남다른 노력을 해온 사람들이 그만한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비범하지 못하다고 해서 쓰고 버릴 소모품 취급을 당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예컨대 아직 태어나지 못한 아기, 더 이상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는 중환자나 노인이라 해서 그 존엄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하나하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2017년 4월 9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대구주보 3면,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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