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아카데미] 철조망 너머에 사람이 있습니다
‘남녘의 나’ ‘북녘의 너’ 하나 이루자 봄 햇살 가득 머금은 이른바 ‘장미대선’을 며칠 앞두고 파주에서 고성까지 4박5일 일정으로 DMZ 평화의 길을 순례하였습니다. 순례 여정 곳곳에서 남북을 가른 철조망을 보았습니다. 이미 오랜 시간 우리와 벗하며 우리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던 철조망, 하지만 일상의 삶에 젖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히는 철조망입니다. ‘우리’를 ‘남녘의 나’와 ‘북녘의 너’로 갈라 세운 철조망은 동족상잔의 참혹한 아픔을 간직한 채 기꺼이 허물어질 날을 애타하건만, 삶의 자리에서 철조망을 애써 지워버린 ‘남녘의 나’는 ‘북녘의 너’와 ‘함께 우리’가 되기를 거부하고, ‘남녘의 나’만이 ‘홀로 우리’라고 애써 자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니 철조망 너머 엄연히 살아 숨 쉬는 ‘북녘의 너’의 존재마저 뜨거운 심장 속에서 지워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북녘의 너’ 역시 ‘남녘의 나’에게 똑같이 그렇게 대하는지도 모릅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마르 3,3)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시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그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뭇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존재하지만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던 그를 다시금 존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존재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음으로써 치유의 여정을 걷기 시작합니다. 사람 밖에서 ‘홀로’ 숨죽이던 사람이 사람들과 ‘함께’ 함으로써 다시 살아납니다. 사람과 ‘단절’되어 죽은 듯 살아야 했던 사람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화해’를 통해서 참으로 살게 됩니다. ‘있는 이를 없는 듯 대하는 것’이 ‘죽임’이라면, ‘없는 듯 있어야 하는 이를 다시 있도록 하는 것’이 ‘살림’입니다. 민족의 화해와 평화 통일은 살림의 길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북녘의 너’와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북녘의 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삶을 강요당했습니다. 이제 이러한 삶은 청산되어야 합니다. ‘남녘의 나’는 ‘북녘의 너’를 만나야만 합니다. “참된 통일은 지역과 지역이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 하나를 이루는 것”(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2012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프란치스코 교황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한국인으로서, 이제 의심과 대립과 경쟁의 사고방식을 확고히 거부하고, 그 대신에 복음의 가르침과 한민족의 고귀한 전통 가치에 입각한 문화를 형성해 나가도록 요청”하면서 “이제 대화하고, 만나고, 차이점들을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기회들이 샘솟듯 생겨나도록,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인도주의적 원조를 제공함에 있어 관대함이 지속될 수 있도록, 모든 한국인이 같은 언어로 말하는 형제자매이고 한 가정의 구성원들이며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더욱더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 강론, 명동 주교좌성당, 2014.8.18.)하자고 제안합니다. ‘남녘의 나’와 ‘북녘의 너’가 서로를 인정하고 만나서 하나를 이룸으로써 얻게 될 한반도의 평화는 동아시아의 평화, 더 나아가 세계 평화를 위해 가장 긴급한 과제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한반도의 평화는 남북의 분단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의 추구를 통해서 날마다 조금씩 이룩되는 것이고, 모든 사람이 평화 증진에 대한 책임을 인식할 때에만 꽃필 수 있으며”(간추린 사회 교리, 495항), “오로지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만 가능”(간추린 사회 교리, 517항)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먼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통한 평화 통일을 위해 앞장서야 합니다. *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 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 및 8지구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7년 5월 21일, 상지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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