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아카데미]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갑니다
원한 깊으면 치유도 어려워 67년 전, 그렇게 긴 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하고도 1개월 2일(1129일)을 끌었습니다. 그러나 긴 나날 매일같이 총을 쏘는 전면전은 아니었습니다. 실제 전쟁 1년 후부터 교착 상태로 밀고 밀리는 국지전 와중에 1951년 7월 10일부터 휴전협상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연합군과 북은 한 치의 영토라도 더 확보한 후 휴전하려는 심산에 협상결렬이 반복되고 3년여 후 휴전되었습니다. 남측 영토였던 개성은 북의 영토가 되고 철원, 인제, 양양, 속초 등은 남측 영토가 되어 38선과 비슷하게 휴전선이 설정되었습니다. 협상이 전개될 즈음 김일성은 미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막강한 화력에 충격을 받고 서둘러 휴전을 원했으나 포로문제와 휴전선의 위치에 대한 연합군의 결단이 늦어지며 협상은 2년여를 끌었습니다. 휴전협상이 2년여 지속된 이유가 이것뿐일까요?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미군의 한반도 북쪽 폭격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는 살상무기의 소비를 의미하고 군수회사의 매출 증가와 성장, 경기부양을 의미합니다. 두 차례 세계전쟁을 치르며 생산하고 남았던 엄청난 무기를 6·25전쟁 때 처리했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습니다. 즉, 미국은 생산된 무기들을 거의 소비한 후 휴전에 합의한 것으로, 한편으론 협상을 진행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재고무기의 처분 상황을 파악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페 2,14)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종교는 결코 폭력이나 전쟁을 정당화할 수 없다’(「주님의 말씀」 102항)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이름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 없다’(2007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고 했습니다. 전쟁은 폭력이며 약자들이 가장 피해를 입습니다. 우선 어린이와 노인, 여성들이 전쟁의 큰 피해자가 되고 한창 공부할 청소년들이 학병이란 이름으로 전쟁에 동원됩니다. 6·25로 인해 유엔군, 중국군, 남·북의 군인, 민간인 피해 650만 명 중에 사망자만 200만여 명에 이릅니다. 사실 이런 희생자의 통계를 넘어 재산 피해, 산업시설 피해 등을 포함하면 피해 규모는 상상을 넘어섭니다. 전쟁 발발 1년 뒤인 1951년 5~6월, 남과 북이 군사 대치할 때와 전쟁을 2년 지연하고 1953년 7월에 설정된 휴전선의 위치가 거의 변화가 없다면 왜 2년을 더 싸워야 했을까요? 전쟁을 2년 지연한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이지요. 2년의 휴전협상 시기에 얼마나 더 희생되었을까요? 6·25 발발 1년 후 전쟁이 교착 상태였을 때 폭력을 중단했다면 억울한 희생을 줄일 수 있었겠지요. 전쟁이 1년이었다면 피해는 당연히 줄었을 것이며 원한도 훨씬 덜할 것입니다. 북측은 휴전을 원했으나 합의할 수 없었고 그 상태로 계속 폭격을 당한 앙금이 얼마나 깊을까요? 그 원한의 깊이를 측정할 수 있겠습니까? 원한과 불신이 큰 만큼 대화도 쉽지 않고 자자손손 이어지고 있습니다. 2년여 기간을 더 공격함은 남침의 대가이며 앙갚음인가요? 진정 이것이 엉뚱한 추측인가요? 오늘은 6·25전쟁 67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 많은 이름 모를 억울한 원혼들은 어디쯤 떠돌고 있으며 산자들의 상처는 언제 치유될까요? 왜 우린 지금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일까요?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원통할 뿐입니다. * 양운기 수사(한국순교복자수도회) -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소속.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상임위원이며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이다. 현재 나루터 공동체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7년 6월 25일, 양운기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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