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합시다! 신앙교리] 사랑의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삶 삼위일체의 하느님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 이해하기에 참 어려운 말이지요? 신학적으로 설명하자면, “하느님은 위격으로는 셋이지만 본체로는 한 분이십니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은 신성으로는 같은 분이시지만, 위격으로는 서로 다른 분이십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삼위일체보다 삼위일치[三位一致]의 하느님으로 부르는 게 더 낫겠다 싶습니다만…) 정확하게는 성부, 성자, 성령이 모두 하느님이신데, 성부는 성자도 성령도 아니시며, 성자도 성부와 성령도 아니시며, 성령도 성부도 성자도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위격으로는 서로 다른 분이시나 신성으로는 같으시다는 말은, 그 하느님이 친교와 일치의 하느님이고, 사랑의 하느님이시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랑의 하느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하느님을 왜 사랑이시라고 하는 것일까요? 하느님은 그 존재의 속성상, 구조적으로 사랑이라는 말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사랑엔 대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삼위일체이시라는 말은 3개의 대상인 성부·성자·성령 삼위가 서로 사랑을 나누어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사랑의 하느님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바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일체의 하느님이 드러났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하느님 자신의 존재양식이 바로 사랑이니. 그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사랑을 통해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신다고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극적으로 드러내시고, 우리 인간이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응답하길 바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사랑은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17) ? 주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뒤, 즉 잡혀가시기 전 마지막 유언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남겨주셨습니다. 이 유언은 그저 듣기만 하고 머리로만 기억할 말씀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고 실천에 옮겨야 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유언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남겨주신 말씀이고, 행동을 촉구하는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지위를 버리시고 자신을 낮추어 죄인으로 돌아가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신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희생일 때를 빼고는 사랑이라고 부를 가치가 없다.”는 로맹 롤랑의 말처럼, 자기를 희생하지 않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님을, 그러한 사랑은 자기 욕망이나 만족을 구하는 애욕(愛慾)에 불과함을 온 몸으로 역설하셨습니다. 형제자매들과의 일치, 그리고 교회 사랑의 하느님께서 넘쳐나는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으니 우리도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본받아 친교, 일치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다른 형제자매들과의 이러한 일치와 대화는 하느님과의 일치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그리고 인간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친교, 곧 사랑의 통교가 가장 잘 이루어지는 곳이 어디일까요? 교회입니다. 바로 우리 교회를 통해서 하느님과 우리 그리고 형제자매들과의 사랑의 통교가 구체적으로, 뚜렷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준비된 마음으로 신앙생활에 임하면서 교회와 더불어 인류와 그리고 세상과 친교를 나누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통교가 우리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음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인 그리스도’의 저자 스킬러벡스의 말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기도하러 간다는 것은 세상을 등지고 교회로 간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하느님을 오직 세상 안에서, 무엇보다도 그 세상 안에서 동료인간들 안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교회를 넘어서 세상 안에서이고, 무엇보다도 함께 사는 사람들을 통하여서라는 말이지요. 심판의 기준인 사랑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31.40.45.46) ?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대로 우리를 심판하게 될 기준과 잣대는 ‘내가 얼마나 사랑을 실천했는가?’ 일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어느 목사님이 하신 심판의 날에 대한 설교말씀을 새겨듣고자 합니다. “그 순간 인간 존재가 당면하는 가장 큰 질문은 ‘얼마나 열심히 믿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했는가’입니다. 종교의 궁극적 질문은 종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느냐, 무엇을 믿었느냐, 무엇을 성취했느냐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얼마나 사랑에 인색했느냐는 것입니다.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추궁당하지 않습니다. 심판의 자리에서 헤아리는 것은 우리가 행한 잘못이 아니라, 행하지 않은 선(善)입니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사랑을 내 안에만 가두어두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혼을 부정한 것이고, 우리가 진정 그를 알지 못했고, 그가 우리에게 베푼 사랑이 무의미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파울로 코엘료의 ‘흐르는 강물처럼’, 188쪽) 레지오 단원 여러분! 사랑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분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무엇보다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일 것입니다. ‘나는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나는 그분의 말씀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습니까?’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7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성당 주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