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합시다! 신앙교리] 교회 공동체의 친교와 사랑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신약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로 이어졌습니다. 이 새로운 백성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구약에서처럼 더 이상 계약과 율법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이 백성의 중심이지요.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소속 여부를 결정짓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 새로운 백성에 이스라엘 백성이 제외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다른 백성들도 하느님의 백성으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보통의 백성이 아닙니다. 교회는 단순한 백성을 넘어 하느님과 인간 간의 친교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가 하나의 백성을 이루는 공동체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사랑으로, 그리고 이웃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뭉쳐진 공동체입니다. 이 교회는 하느님을 찬양하러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기 때문에 이루어진 공동체이며, 그러기에 하느님에 대한, 하느님 안에서의 사랑으로 묶여진 친교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교회의 목적과 중심 그러므로 교회의 목적은 여느 다른 사람들의 모임과는 다릅니다. 교회는 자신의 관심사나 유익과 이익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경배와 사랑의 생활,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미리 살고 그 나라를 전함이 그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신자들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여야 할 것이고, 그 상호적인 사랑이 교회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신 안에 닫혀져 있는 폐쇄적인 집단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열려져 있고 사랑의 실천으로 모든 이를 향하여 나아가는 공동체여야 하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치프리아노 교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랑과 자비의 끈을 통하여 한 마음 한 몸을 이루어야 함을 명하고 계신다. ……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Cipriano, Liber De Unitate Ecclesiae, XIV: PL 4, 526b. 527A).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과 세상과의 이상적인 원래의 관계, 곧 사랑의 공동체를 다시 복구시키기 위해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구세주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러한 목적 성취를 위해 있는 것이 교회로서, 사랑이 그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 교회공동체에 내려진 제1 생활 수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계명과 명령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사랑과 친교로 일치하는 공동체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인 우리는 서로 사랑하되 예수님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섬겨야 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전파와 복음 선교도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더구나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인 우리 자신이 먼저 사랑을 실천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 공동체에서 중요한 것은 일치(unitas)입니다. 이러한 일치는 오직 하나의(uni-) 꼴과 형태(forma)를 갖추는 통일(uniformitas)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획일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다양성 안에서 하나가 되려는 노력을 말합니다. 이렇게 교회는 그 구성원들이 서로 내적으로 연결되는 공동체, 내적으로 친교를 함께 나누는 내밀한 관계를 가진 공동체, 서로 친교(communio)를 나누는 가운데 일치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 공동체는 나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공동체인 것이지요. 공동체 안에서의 인내와 이해, 희생과 배려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인내하고 이해하고 희생하고 배려하는 자세입니다. 고진하 씨가 쓴 ‘부드러움의 힘’이란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떤 나라에 황금빛의 열매를 내는 진기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의 길게 뻗어나간 두 가지 중 한 가지는 죽음을, 다른 한 가지는 생명을 담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나라의 어떤 사람도 그 황금빛 도는 생명의 열매를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가지의 열매가 죽음을 가져오는지를 아무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다가 그 나라에 기근이 닥쳐 먹을 것이라고는 씨가 마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나무만은 먹음직한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굶주린 사람들은 그 진기한 나무 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감히 먼저 나서는 사람이 없었지요. 바로 그때 굶어 죽기 직전의 아들을 지켜보던 한 사나이가 용기를 내어 나무로 다가갔습니다. 그러고는 오른쪽 나뭇가지의 열매를 따 먹어 보았습니다. 그래도 죽지를 않았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그 가지에 달려들어 열매를 따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열매를 따먹고 난 다음 그 자리에 또 황금빛 열매가 열리는 것 아닙니까! 이후 사람들은 그 신기한 나무의 왼쪽 가지가 위험하기만 할 뿐 전혀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로 그 가지를 아예 잘라 버리기로 결정했지요. 그렇게 가지를 잘라버린 다음날이었습니다. 오른쪽 가지에 달린 열매들이 온통 땅에 떨어져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몸의 절반이 잘려 나간 나무는 검게 변해버렸고, 나무 위에서 지저귀던 새들마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 나무는 더 이상 살아도 살아있는 나무가 아니게 되었지요. 성당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 형편없이 고약하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좀 없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인 나부터 벌써 죄성을 지닌 연약한 사람 아닙니까? 그렇다면 나와 같은 사람들로 모인 공동체인 교회도 죄성을 지닌 연약한 공동체인 것이며, 나는 그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들을 인내하고 이해하며, 그들을 위해 희생하고 배려하는 나 자신이 되도록 힘쓸 일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레지오 단원 여러분! 우리 교회에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지만, 그래서 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그 가운데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거룩하고 힘 있는 공동체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더라도 좀 참고 이해하고, 차라리 좀 손해보고 배려하길 힘쓰는 우리들이 됩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9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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