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합시다! 신앙교리] 교회와 함께하는 삶과 주님 부르심에 대한 응답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 하느님은 삼위일체, 곧 성부·성자·성령으로 계시는 분이시고, 사랑으로 결합된 친교의 하느님이십니다. 그 친교의 하느님은 당신의 크신 사랑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인간과 사랑을 나누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응답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자’는 말은 너무 엄청난 말이지요. 따지고 보면 터무니가 없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실 하느님은 우리의 사랑을 꼭 혹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의 사랑을 원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충만하신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이미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사랑을 나눌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자’고 말하기보다 정확하게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자’고 해야 하겠습니다. 교회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에의 응답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할 것입니까? 교회와 더불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 대한 당신의 한없는 사랑을 당신의 교회를 통해서 구체화하시니까요. 교회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느끼고, 체험하며, 교회를 통해서 하느님께 우리의 사랑을 드리니까요.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구약의 교회를 통해서 준비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건설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이 교회 안에 하느님과 인간과의 사랑의 관계가 지속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교회 안에 언제나 함께 계시고, 당신의 영이신 성령을 통하여 사랑의 관계가 교회 안에서 지속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친교는 물론이고 인간과의 친교도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나누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친교의 예를 들자면, 성사들, 특히 성체성사 같은 미사와 전례, 그밖에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원조와 봉사, 그리고 어려운 이들에 대한 애덕의 실천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이는 교회와 가정과 사회 안에서의 친교와 사랑의 삶 이러한 모든 일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친교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친교의 행위, 친교의 삶을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더불어 하는 것이고, 다른 그리스도인과 함께 하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함께 모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고요? 함께 모임으로 교회가 시작되고 그 교회의 존속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함께 모임으로 친교가 가능하기 때문이고, 함께 모임으로 더 큰 친교로의 준비와 실천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함께 있다는 것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함께 산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친교의 삶을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함께 모이는 곳에서, 곧 교회에서 우리는 사랑을 받고, 주고, 서로 간에 친교를 나누는 것입니다. 교회라고해서 성당의 건물을 가진 교회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교회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가정은 ‘가장 작은 교회’, ‘가장 작은 친교의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와 가정이라는 공동체의 친교는 올바른 대화가 그 기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를 위해 구성원 간에 상하관계가 아닌 동등한 인격관계가 필요합니다. 가정으로 말하자면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그밖에 고부간에 서로를 인격적인 대화의 파트너로 여기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 안에서도 친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의 유익만을 돌보지 않고, 가족이기주의를 극복하여, 남의 유익도 생각하고 배려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친교의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사랑의 삶을 산다는 것이고, 사랑의 삶을 산다는 것은 기본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삶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응답 ‘줄탁동시(茁啄同時)의 진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미닭은 모성적 본능으로 알을 소중하게 품고 있다가 시간이 되면 병아리가 나올 수 있도록 껍질을 쪼아주는데, 그때 알 안에서도 병아리가 나오기 위하여 껍질을 쫍니다. 껍질이 깨어지려면 암탉과 병아리가 동시에 같은 지점을 쪼아야만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안에서 병아리가 껍질을 쪼는 행위를 줄(茁)이라 하고, 밖에서 암탉이 쪼는 행위를 탁(啄)이라 하는데, 이러한 상호관계를 줄탁동시(茁啄同時)의 진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부르심도 같은 원리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즉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고 우리를 당신의 제자 직으로 초대하시는데, 주님의 초대만으로는 우리의 제자직분이 형성될 수 없고, 그에 상응하는 우리의 응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송봉모 신부님의 시를 소개합니다. “나는 주님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후에 나는 알았지요. / 주님께서 내 영혼을 감동시키시어 나를 찾으시는 주님을 찾게 하셨다는 것을 / 참되신 구세주여, 찾은 것은 내가 아니었습니다. / 오히려 내가 주님께 찾아간 것이었지요. 나는 풍랑이 이는 바다 위를 걸어갔으나 빠지지 않았습니다. / 오, 주님, 그것은 내가 주님을 붙들었기보다는 주님께서 나를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님을 발견하고 사랑합니다. / 그러나 주님, 나의 사랑은 주님께 대한 나의 대답에 불과합니다.”(송봉모, 누구를 찾고 있소?, 야곱의 우물, 2003년 6월호) 레지오 단원 여러분! 주님께서 이미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분의 은총이 이미 나에게 내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떤 응답을 드리고 있는가요? 혹 달걀 안에서 껍질을 쪼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듭니까? 죽기 살기로 노력하는 병아리를 생각하고 용기를 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 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 보다 더 애를 쓰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업적보다 더 클 것이고, 우리의 응답은 언제나 부족할 것입니다. 우리의 응답이 크면 클수록 그 결실도 클 것임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11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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