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아카데미] 윤이상 탄생 100주년에
더 이상 개구리 소리 들을 수 없다면… 그의 음악은 독립과 해방운동이었기에 1943년 항일 지하활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습니다. 또 민주를 표현하는 저항이었기에 1967년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동백림 사건’을 통해 간첩으로 몰려 옥고를 치르며 ‘나비의 꿈’을 작곡했습니다. 통일을 말하는 화해였기에 기꺼이 ‘범민족통일음악회’의 산파역을 맡았습니다. 억울한 백성들의 분노였고 시대의 증인이었기에 광주항쟁 때 분신 항거한 열사들의 넋을 추모한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를, 생명과 평화였기에 ‘광주여 영원하라’를 작곡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천재적 음악성에도 비운의 사나이였습니다. 끝내 고향땅,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독일에 귀화해야 했던 ‘야만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세계 5대 작곡가라는 명예에도, 천형(天刑)이었습니다. 그의 탄생 100주년입니다. 100년 동안 근대화의 물결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꿔 놓았습니다. 산업화, 자본주의, 민주주의, 합리주의 등을 몸에 익혔고 풍요를 향해 달렸습니다. 경쟁은 인간을 무한대로 무장시켰고 ‘승자 독식’은 이웃의 존재를 망각케 했습니다. 욕망은 인간성의 확인이라고 외치며 쉼 없이 달렸으나 과연 우리가 달려온 곳이 어디입니까? 얻은 것만큼 파괴했으며, “해마다 수천 종의 동물과 식물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영원히 사라져 버려서 우리가 전혀 모르게 되고 우리 후손들은 전혀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찬미받으소서」 33항) 그는 여름 논의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음악적 감수성을 키웠지만 지금은 예전처럼 개구리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해마다 여의도 땅 5배의 경작지가 공장부지로 변하고 있습니다. 개구리가 사라져 가고 있기도 하지만 수많은 생물 종들은 사람들의 경제, 상업, 생산 등의 활동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사람끼리만 살 수 없으며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자연 안에서 외로움과 상처가 치유됩니다. 이제 누가 우리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신비의 소리를 들려줄 것입니까? 어떤 소리가 우리의 메마른 감수성을 자극하고 우리 심성을 풍요롭게 해줄 것입니까? 우리가 그토록 하찮게 대접했던 무지렁이들이 급속히 사라진다면,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가 내지 못하는 소리로 하늘을 향해 탄원할 것입니까? 아니, 우리의 고통이 극심하여 소리마저 낼 수 없을 때, 그 신비의 소리로 우리를 대신하여 울어줄 풀벌레가 없을 때, 우린 그 외로움을 어떻게 감내해야 한단 말입니까? 사람은 배고파서 죽기도 하지만 외로워서 죽기도 한다는 사실을 정녕 모른단 말입니까? 그의 음악을 흠모한다면 개구리 소리를 들을 때 눈을 감아야 하고 공해와 오염으로 죽어가는 작은 풀벌레 앞에 고개 숙여야 합니다. 그의 음악에 우리의 지친 영혼이 위로 받고 있다면 우린 자연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시대의 어둠을 온몸으로 넘어선 그의 탄생 100년이 되었습니다. 경남 통영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의 거리에서 인간을, 독립과 해방을, 민주와 저항을, 통일과 화해를, 생명과 평화를, 인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고향땅의 흙, 산과 들, 파도소리, 바람소리, 개구리 소리 등을 음악으로 알았던 천재적 생태주의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역사를, 우주를, 아! 하느님의 신비를 만날 수 있습니다. * 양운기 수사(한국순교복자수도회) -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소속.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상임위원이며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이다. 현재 나루터 공동체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7년 12월 3일, 양운기 수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