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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펀펀 사회교리: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 소수자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12-27 조회수8,232 추천수0

[펀펀 사회교리] (50)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 소수자 ① ‘동성애’ ‘성전환’… 신앙인은 어떻게 봐야 할까?

 

 

베드로가 아침부터 신문을 들고 구시렁대며 백 신부를 찾는다.

 

“신부님 이 기사 보셨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아, 글쎄 김조광수(51)라는 분과 김승환(32)이라는 남자 두 분이 혼인 신고서를 서대문구에 제출했는데 받아 주지 않는다고 소송을 걸었네요. 그런데 법원에서 각하결정 했다고 합니다. 이거 원 뭘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남자들끼리 이렇게 사랑하는 걸 천주교에서는 허용하나요?”

 

백 신부는 베드로의 질문이 너무 난감하고 어이가 없어서 신문을 받아들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소리를 꽥 지른다.

 

“아니 이거 봐요! 이 신문 2016년 5월 거잖아요. 지금이 어느 땐데 오래된 신문을 들고 와서 이런 곤란한 질문을 하는 겁니까?!”

깜짝 놀란 베드로가 입을 삐죽이며 구시렁댄다.

 

“아니 뭐, 아침에 출근하다가 신발장에 깔려 있기에 그냥 꺼내보니 신기해서 들고 왔는데… 그걸 가지고 신부님이라는 사람이 신자 보고 소리를 지르고… 이거 무서워서 어떻게 출근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곤란한 질문에 난감해지고, 성질머리 급한 걸 드러내는 바람에 더욱 난감해진 백 신부가 슬슬 진압 작전에 들어간다.

 

“하하 베드로씨 놀랬죠? 사실 제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데… 이 기사 자체가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교회 매체에서 다루기가 영 쉽지가 않습니다. 심지어 사회교리 서적을 이리저리 뒤적여보아도 딱히 동성애나 트랜스젠더 등 성 소수자에 대해 속 시원히 풀어 놓은 교리서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원칙이야 있지만 원칙대로 이야기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받게 될 것이고, 시대를 앞서가자니 교회 권위에 도전하는 이단아가 되어서 뼈도 추리기 힘들 것 같고… 이거 그냥 안 본 걸로 하고 넘어가면 안 될까요?”

 

‘딱 걸렸네, 딱 걸렸어! 아니 이럴 수가 백 신부님이 드디어 말씀하기 곤란한 질문을 받았다 이 말씀이지. 좋았어, 계속 밀어 부쳐야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른 베드로가 말한다.

 

“아니, 신부님. 신부님께서 이런 걸 모른다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동성애 문제 같은 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데… 피하기만 한다고 될 일입니까?! 한 번은 짚고 넘어가셔야 할 일 아닙니까? 저 오늘 답 듣지 못하면 집에 안 갑니다.”백 신부가 곤란한 얼굴로 신문을 보다가 베드로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말한다.

 

“베드로씨 이렇게 합시다.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갑시다. 뭐랄까, 함께 공부한다고나 할까요? 사실 이 주제는 너무 예민해서 이런 자리에서 다루기가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정통 교리와 현대 사회에서 제기되는 현실적 문제, 사목 대상으로서의 성 소수자에 대한 배려 등 여러 부분들을 차근차근 짚어 가보면 어떨까요?”

 

백남해 신부(요한 보스코 · 마산교구 사회복지국장) - 마산교구 소속으로 1992년 사제품을 받았다. 마산교구 사회사목 담당, 마산시장애인복지관장, 창원시진해종합사회복지관장, 정의평화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가톨릭신문, 2017년 12월 25일, 백남해 신부]

 

 

[펀펀 사회교리] (51)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 소수자 ② 사회의 주된 성 정체성과 다른 이들

 

 

동성애라는 어려운 주제를 던져놓고, 전투력이 천배 정도 상승한 베드로가 백 신부의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그 눈빛만으로도 벌써 백 신부를 제압하고도 남을 지경이다. 그러나 호락호락한 백 신부가 아니기에….

 

“베드로씨 성소수자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세요? 게이, 레즈비언, 퀴어, 이반, 호모, 동성애, 양성애, 무성애, 트랜스젠더…. 아시겠어요?!”

 

백 신부의 일갈에 일순 베드로가 무너진다.

 

“음…. 신부님 무슨 말씀이신지 도저히…. 천천히 다시 가죠.”

 

“그러실까요. 역시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죠.(백 신부 뻐기기는 쳇!) 자, 지금부터 용어의 개념부터 하나하나 짚어 보겠습니다. 아직 논란이 있는 말도 있고 그냥 통상적으로 쓰이는 말들도 있습니다. 말은 그 정신과 사회 문화가 녹아 있는 것이니만큼 중요하겠죠. 먼저, ‘성소수자’(Sexual minority)라는 말은 1960년대 스웨덴 정신의학자인 ‘랄스 울레르스탐’의 저서에서 유래되어 소수민족이란 단어와 유사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답니다. 하지만 성소수자가 단지 숫자가 작은 집단이라는 뜻만 가진 건 아닙니다. 사회에 의해 소수화되고 비주류화되어 사회 밖으로 밀려났다는 어려움을 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주된 성 정체성과 다른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로 가장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하지만 깊이 있고 다양한 성 정체성들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베드로씨 알아들으시겠어요? 사실 나도 이야기하면서 막 헷갈립니다.”

 

“신부님, 계속 하다보면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 먼저 ‘게이’(gay)라는 말을 볼까요. 우리나라 일반인들 사이에서 ‘남성 동성애자’로 주로 통용되고 있는 외국어입니다. 아시겠지만 원래 뜻은 ‘유쾌한’ ‘활발한’ 등의 뜻을 지녔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남성 동성애자’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게이 바’라고 부르는 술집이나, 여러 가지 서로 어울려 놀기 좋은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사회적 편견과 눈치 때문에 드러내 놓고 동성애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게이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있어요. 첫째, 남자라고 해서 다 좋아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겁니다. 게이들이 외모를 더 따지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이런 외모 지상주의는 결단코 없어져야 합니다!) 둘째, 게이라고 해서 반드시 항문성교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항문 성교 때문에 에이즈에 대한 큰 오해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셋째, 성욕은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똑같다고 합니다. 넷째, 주변에 여성스럽게 행동하는 남성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게이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수많은 편견이나 오해가 있지만 오늘은 이정도만 할까요?” [가톨릭신문, 2018년 1월 1일, 백남해 신부]

 

 

[펀펀 사회교리] (52)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 소수자 ③


레즈 퀴어 이반… 성 정체성 뜻하는 말, 비아냥대듯 하는 것도 편견이며 차별

 

 

“‘레즈비언’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여성 동성애자를 뜻하는 말인데요. 줄여서 흔히 ‘레즈’라고 부릅니다. 좀 놀라운 것은 성 소수자들인 남·여 동성애자들에게도 사회적 차별이 있다는 것입니다. ‘게이’들은 가끔씩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지만, ‘레즈비언’들은 그런 경우가 극히 드뭅니다. 사회적 인식이 남자보다 더 악하게 여기거나, 심지어 물리적 공격을 받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든지 존재하는 남녀차별 이거 없어져야 합니다.” 

 

백 신부의 열변을 들으며 베드로가 넌지시 묻는다.

 

“신부님 너무 몰입하시는 것 아닙니까? 혹시….”

 

“어허, 베드로씨 상대편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 그런 이상한 눈길을 주거나, 비아냥대듯 하는 것도 편견이요, 차별이에요. 조심하셔야 합니다.”

 

백 신부의 꾸지람에 뜨끔한 베드로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백 신부가 허허롭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괜찮아요. 제가 괜히 그래봤어요. 어쨌든 이 ‘레즈비언’이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 시대 유명한 여성 동성애자 시인인 사포가 살았던 ‘레스보스’ 섬에서 나왔다고 해요. ‘레스보스 섬의 여인’이라는 뜻인데, 사포와 여성들 사이에서 동성애가 이루어지면서 ‘레즈비언’이라는 뜻이 새로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어느 나라든지 여성들은 배움의 기회가 적었잖아요? 사포가 시인이자 선생님으로 활동하며 모인 이들이 동병상련, 연민의 정에서 시작된 연애감정이 아닐까 싶네요. 자세한 것은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시구요. 

 

다음은 ‘퀴어’(Queer)라는 말입니다. 들어보셨죠? 서울 ‘퀴어 문화 축제’라고요. 2000년 이후부터 6월에서 9월 사이에 열리는데 이때마다 사회적 이슈가 되곤 한답니다. 여기서 ‘퀴어’는 본래 ‘이상한’, ‘색다른’ 등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성 소수자들이 이 단어를 가져와서 자신들의 성 정체성을 나타내는 말로 쓰고 있습니다.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젠더 등을 포괄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고요. ‘퀴어 퍼레이드’, ‘퀴어 영화’ ‘퀴어 축제’ 등으로 쓰이고 있답니다. ‘이반’이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데요, 사회 ‘일반’적인 현상과 다르다는 뜻으로 ‘이반’이라고 합니다. ‘호모’라는 말도 있는데 요즘은 잘 쓰지 않습니다. 남성 동성애자를 매우 비하하는 말이거든요. 사실 ‘호모’(Homo)는 라틴어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호모 사피엔스’ 같은 경우죠. 그런데 동성애를 경멸하는 은어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요즘은 ‘게이’라는 말로 남성 동성애자를 지칭합니다.” [가톨릭신문, 2018년 1월 7일, 백남해 신부]

 


[펀펀 사회교리] (53)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소수자 ④ 다양한 사람들… 성적 끌림도 다양

 

 

앞서 게이, 레즈비언, 퀴어, 호모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죠? 오늘은 먼저 성애의 방식을 볼까요? 성애는 간단히 말하면 ‘사람 사이의 성적인 애정관계’라고 하겠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성애가 ‘이성애’죠. 서로 다른 성(남·여)끼리 애정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양성애’는 성을 구분하지 않고 어떤 성별이든 애정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모두를 사랑한다는 면에서는 좋은 것인데…. 참, 뭐라 해야 할지…. 하느님 창조 질서에는 좀…. 그리고 ‘무성애’도 있습니다. ‘무성애’라…, ‘타인에게 성적인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고요. 금욕주의자나 아직 짝을 만나지 못하고 성에 눈 뜨지 못한 이성애자와 다르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성이나 동성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랍니다. 단지, 이성을 성욕 없이 좋아하거나, 동성을 성적 끌림이 없이 순수한 마음만의 끌림으로 좋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 부분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쉰이 훌쩍 넘어버린 저도 아직 매력적인 대상을 보면 끌림이 없다고 말하지 못하거든요. 뭐, 평생을 그렇게 살다보니 머리로는 이해하겠는데,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없네요.”

 

백 신부 말을 조용히 듣던 베드로가 말을 거든다.

 

“신부님, 저야 아직 총각이고 결혼을 꿈꾸기 때문에 신부님과 다를 수 있지만…. 뭐, 누구나 그렇게 시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신부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까요(근데 이게 무슨 소리야??).”

 

“베드로씨 그게 뭔 말이래요? 핫핫, 어쨌거나. ‘동성애’는 말 그대로 같은 성별에게서 성적 끌림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성적인 애정 관계도 단순하지 않죠? 사실 자세히 들어가면 학자들이 더 많이 분류해 놓았습니다. 그건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공부하시기를 바라고요. 우리가 많이 접하는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사실 ‘트랜스젠더’를 우리가 쉽게 이야기하게 된 것은 불과 십수 년에 불과합니다. 잘 아시는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씨 때문이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중문화나 성애 인식의 사회적 변화에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옳고 그름(그렇게 볼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지만)을 떠나서 그 분의 삶과 용기에 지지를 표합니다. ‘트랜스젠더’는 태어날 당시의 법적인 성별과 생물학적 성별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성기의 모양이나 다른 요건으로 ‘이 사람은 남자다, 여자다’라고 사회적으로 지정을 합니다. 그러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런 줄 알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사회와 다른 사람이 지정해준 성별을 스스로 생각하고 느껴보니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트랜스젠더’인 것이죠.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로 봐서 의학적으로 ‘트랜스젠더’는 ‘정신질환’은 아니라고 합니다.” [가톨릭신문, 2018년 1월 14일, 백남해 신부]

 

 

[펀펀 사회교리] (54)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소수자 ⑤ 시대와 나라 따라 달리 여긴 동성애

 

 

“지금까지 성소수자들에 대한 용어를 간략하게 알아보았습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성소수자를 이해하는 기초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성소수자, 특히 ‘동성애’의 역사와 다른 나라의 모습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할까요?”

 

백 신부의 말에 베드로가 흥미로운 듯 말한다.

 

“신부님, 사실 성소수자에 대해서 단순하게 여겼는데 말씀 듣고 보니 간단치만은 않네요? 또 역사나 다른 나라 상황은 어떤지 자못 궁금합니다.”

 

“성소수자에 대해 안다는 것은 단순히 한 부류의 성적 취향을 안다는 것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인권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고, 사람의 본성에 관한 고뇌이기도 하고…, 좀 그렇죠? 자 그럼, 역사를 한 번 훑어볼까요? 좀 충격적인 것이, 동성애는 인류가 출현하기도 전에 벌써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외에 광범위한 동물들이 동성애를 즐기거나 어쩔 수 없이 행한다는 것입니다. 신라시대 화랑이 동성애를 했다는 추측이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고려시대 때 목종이 동성애에 몰두했다거나 공민왕이 말기에 미소년들과 관계를 맺기도 했다는데요. 이것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가 ‘쌍화점’이랍니다. 조선시대가 되면 유교의 영향으로 동성애는 배척당합니다. 서양으로 가보면, 고대에는 동성애가 꽤 유행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동성애를 권장할 뿐 아니라 동성애자로 만든 부대까지 있었습니다. 연인이 곁에 있다면 더욱 용감해지기 때문이랍니다. 실제로 ‘테베’의 ‘신성부대’는 동성애 부대였는데 싸움을 잘했다고 합니다. 쩝, 뭔가 이상한….” 

 

“신부님, 혹시 남자 간의 우정과 혼동한 것은 아닐까요? 저도 군복무를 했지만 군대라는 곳이 남자들을 끈끈한 전우애로 뭉치게 하는 곳 아닙니까? 혹시 그런 것 아닐까요? 전 도저히 이해하기가…. 참.”

 

“하하. 베드로 씨,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지금 시대 사회분위기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겠죠. 저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고대 그리스는 현대 한국 사회와 분위기나 철학적 관점이 많이 다르답니다. 이런 다름과 차이에 대해서 이해를 할 수 있어야 성소수자에 대한 문제를 계속 볼 수가 있습니다. 나의 관점이나 신념과 다르다고 해서 배척하기만 한다면 세상에 대한 이해가 좁아지고, 좁아진 이해는 편협한 사람을 만들기 쉽습니다. 보자…. 계속 보면, 유럽 중세시대에는 그리스도교 사상의 영향으로 동성애가 죄악이 됩니다. 악마 숭배자와 동급이 되어서 불로 태워 죽였다는군요. 이것도 좀 심하죠? 이슬람 국가들은 과거에는 대체로 동성애에 대해 관대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요즘은 사형까지도 가능한 죄로 여긴다고 합니다.” [가톨릭신문, 2018년 1월 21일, 백남해 신부]

 

 

[펀펀 사회교리] (55)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소수자 ⑥ ‘피해자 없는 범죄’는 범죄가 아니다

 

 

한숨 돌린 백 신부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매우 중요한 개념 한 가지를 알게 됩니다. ‘피해자 없는 범죄’라는 개념입니다. 1791년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는 형법에서 피해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범죄로 여겨지던 것들을 범죄가 아니라고 정의합니다. 이단이나 마법, 마녀, 동성애 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이전까지 범죄로 여기고 처벌까지 했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구체적이고 특정한 피해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피해자도 없는데 단지 나와 성적 취향이나 성향이 다르다고 해서, 내가 그것을 싫어한다고 해서 범죄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범죄는 내가 싫고 좋고를 떠나서 법에 의한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후로 유럽에서 서서히 ‘피해자 없는 범죄’는 범죄가 아니라는 의식이 퍼져 나가게 되고, 동성애는 범죄가 아니라고 여겨지게 됩니다. 베드로씨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피해자 없는 범죄’를 범죄로 여기던 70년대 시절이 있었죠. 알고 계세요? 저는 어릴 때 실제로 보기도 했습니다.” 

 

자랑할 게 없으면 나이가 벼슬이라고, 옛날이야기로 기죽이려는 백 신부의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한 베드로가 말을 잇지 못하자 백 신부는 자랑스러운 듯 이야기를 한다.

 

“거, 옛날에는 장발 단속이니 미니스커트 단속이니 해서 경찰들이 젊은이들 머리나 치마길이를 재고 그랬다니까요!(아차, 베드로 얼굴이 찡그러지는 게 옛날이야기 그만해야겠다). 그건 그렇고, 유럽이나 미국 등 많은 나라에서는 성인이라면 서로 합의한 동성애 성행위는 허용한답니다. 또한 동성 결혼을 허용하는 나라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동과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서는 동성애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곳이 많고 극단적으로는 사형에 처하기도 한답니다. 문화권에 따라서 차이가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동성 결혼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차별금지법’에 의해서 동성애자에 대한 어떠한 차별도 자행되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6년 김조광수와 김승환 두 사람의 혼인 신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소송을 걸었지만 법원에서 각하되었고 아직 논란 중입니다. 어떤 결론이 날지 알 수 없지만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많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20여년 전만해도 입에도 올리지 못하던 말들이 이제 공론의 장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발전이라면 발전이고, 세상이 망조가 들었다고 하면 망조가 든 것이겠죠. 베드로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발전일까요 망조일까요.”

 

“음…. 신부님 어떤 사람의 성적 취향에 대해 답을 강요하는 것도 인권 침해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가톨릭신문, 2018년 1월 28일, 백남해 신부]

 

 

[펀펀 사회교리] (56)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 소수자 ⑦ 성경에 나타난 동성애 어떻게 이해할까

 

 

“성경 말씀을 들어볼까요?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에서부터 나옵니다. 주님의 두 천사가 소돔에 그 죄악을 벌하려고 갔을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천사들을 대접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들려줍니다.” 

 

<그들이 아직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성읍의 사내들 곧 소돔의 사내들이 젊은이부터 늙은이까지 온통 사방에서 몰려와 그 집을 에워쌌다. 그러고서는 롯을 불러 말하였다. “오늘 밤 당신 집에 온 사람들 어디 있소? 우리한테로 데리고 나오시오. 우리가 그자들과 재미 좀 봐야겠소.” 롯이 문밖으로 나가 등 뒤로 문을 닫고 말하였다. “형제들, 제발 나쁜 짓 하지들 마시오. 자, 나에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딸이 둘 있소. 그 아이들을 당신들에게 내어 줄 터이니, 당신들 좋을 대로 하시오. 다만 내 지붕 밑으로 들어온 사람들이니, 이들에게는 아무 짓도 말아 주시오.” 그러나 그들은 “비켜라!” 하면서 “이자는 나그네살이하려고 이곳에 온 주제에 재판관 행세를 하려 하는구나. 이제 우리가 저자들보다 너를 더 고약하게 다루어야겠다.” 하고는, 그 사람 롯에게 달려들어 밀치고 문을 부수려 하였다. 그때에 그 두 사람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 안으로 끌어들인 다음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집 문 앞에 있는 사내들을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눈이 멀게 하여, 문을 찾지 못하게 만들었다.>(창세 19,4-11) 

 

“소돔과 고모라는 가장 추악한 죄를 지은 도시의 대명사입니다. 결국 그 죄 때문에 멸망하고 맙니다. 소돔이 지은 대표적인 죄가 동성에 의한 성폭행으로 보여집니다. 소돔의 사내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요구하는 것은 두 남자들과 재미를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간(鷄姦)이라고 합니다. ‘사내끼리 성교하듯이 하는 짓’이라고 사전은 설명합니다. 닭이 교미할 때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지은 것입니다. 영어로는 sodomy라고 합니다. 아예 소돔에서부터 남성 동성행위가 시작됐다고 나타내고 있습니다. 롯이 처녀 딸을 내어준다고 해도 폭도들은 듣지 않습니다. 결국 천사들이 폭도들의 눈을 멀게 합니다. 죄악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인간을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찬찬히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동성애가 나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기는 하지만, 진짜 큰 죄는 남자든 여자든 강제로 성폭행을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변할 수 없는 하느님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알아듣는 사람의 인식의 넓이와 깊이가 늘 똑같지는 않습니다. 말씀에 목말라하는 이들을 위해 성경 말씀을 모국어로 번역했다는 이유만으로 화형당하는 시대도 있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의 깨달음은 점점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8년 2월 4일, 백남해 신부]

 

 

[펀펀 사회교리] (57)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 소수자 ⑧ 동성애뿐 아니라 부정한 관계 전반을 처벌

 

 

동성애에 대한 성경말씀을 계속해서 이어간다.

 

“레위기 20장 13절에서는 <어떤 남자가 여자와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그 둘은 역겨운 짓을 하였으므로 사형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죗값으로 죽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앞 뒤 구절들을 포함한 전체 말씀을 보면 꼭 동성애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부정한 성행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 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기준으로 보면 너무 심하다고 할 만한 내용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9절에 <누구든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면, 그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였으니, 그는 자기의 죗값으로 죽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너무 심하죠. 요즘 자식들이라면 사형 당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또 특이한 것은 남성 동성애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데, 여성 동성애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남성 동성애를 지적하면 당연히 여성 동성애도 지적한 것이라고 유추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해석을 하자면, 여자는 사람으로서 온전한 권리나 대접을 받지 못하였기에 언급하지 않았을 수도 있단 겁니다. 이것은 자위행위에 관한 성경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자위행위의 어원이 ‘오나니’입니다. 이 ‘오나니’는 유다의 아들 ‘오난’의 이름에서 온 말입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유다가 오난에게 말하였다. “네 형수와 한자리에 들어라. 시동생의 책임을 다하여 네 형에게 자손을 일으켜 주어라.” 그러나 오난은 그 자손이 자기 자손이 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형수와 한자리에 들 때마다, 형에게 자손을 만들어 주지 않으려고 그것을 바닥에 쏟아 버리곤 하였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그도 죽게 하셨다.>(창세 38,8-10)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형이 자식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잠자리를 하여 형의 대를 이어 주어야했습니다. 그런데 동생 오난은 형수의 아이가 자기 아이가 되지 않을 것을 알고 ‘그것을’ 바닥에 쏟아 버립니다. 여기서 ‘오나니’라는 말이 나왔고, 하느님께서는 남자가 고의로 ‘그것을’ 쏟아 버리는 행위를 악하게 여기고 죽여 버리십니다. 여기서 유추하면 여자는 바닥에 쏟아 버릴 ‘그것’이 없기 때문에 여성의 ‘오나니’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이것은 여자를 남자인 아버지나 남편의 사유물이나 재산쯤으로 여기고, 아이 낳는 통로정도로 여겼기 때문에 생겨난 인식입니다. 마찬가지로 여성의 동성애도 그리 심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사람처럼 생긴 재산 쯤이었으니까요. 베드로씨 우리는 편하게 이런 이야기하지만, 여성에 대한 차별과 사회적 편견을 예수님께서 하나둘 깨 나가신 것은 사실 목숨을 거는 일이었죠. 그리고 결국 살해 당하셨고요.” [가톨릭신문, 2018년 2월 11일, 백남해 신부]

 

 

[펀펀 사회교리] (58)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소수자 ⑨ 남장 여자와 여장 남자

 

 

“베드로씨, 성경 말씀을 하다 보니 조금 지루하죠?” 백 신부의 질문에 베드로가 의외의 이야기를 한다.

 

“아닙니다, 신부님. 사실 제가 성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보니 그냥 성경은 좋은 말씀 거룩한 말씀만 적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인간 삶의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있어서 놀랍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합니다.”

 

“그래요. 지겹지 않다니 다행입니다. 성경 말씀 중에서 약간 특이한 성소수자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자가 남자 복장을 해서도 안 되고, 남자가 여자 옷을 입어서도 안 된다. 그런 짓을 하는 자는 누구든지, 주 너희 하느님께서 역겨워하신다.’(신명 22,5)는 말씀이 있는데요. 이렇게 자기 자신과 다른 성의 복장을 즐기는 것을 ‘이성복장 도착증’ ‘트랜스베스티즘’(Transvestism)이라고 합니다. 정신병으로 보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요. 우선 당사자가 질병이라고 받아들일 때만 병으로 분류합니다. 하지만, 성적인 동기가 있으며 이것 때문에 정신적,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경우에는 질병으로 여깁니다. 흔히 성전환과 비슷한 의미로 착각하기 쉬운데요. 성전환자들이 자신의 성을 바꾸고 싶어 하는 것과 달리 이들은 단지 이성의 복장, 말투, 행동을 광적으로 추구, 선호하는 행위를 하면서 일종의 성적흥분이나 쾌락을 느낀다고 합니다. 사족을 붙이자면, ‘바바리 맨’과는 엄격히 구분해야 합니다. ‘바바리 맨’은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과 달리 슈퍼히어로가 아니고 범죄자입니다(ㅎㅎ). 어쨌든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오니 재미있지 않습니까? 까마득한 옛날에도 이런 사람들은 있었답니다. 또 성경의 다른 구절이 호기심을 끄는데요. ‘이스라엘의 딸은 신전 창녀가 되어서는 안 되고, 이스라엘의 아들은 신전 남창이 되어서는 안 된다.’(신명 23,18)는 말씀입니다. 즉, 창녀와 남창은 허용하되 이스라엘의 아들, 딸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 집 자식 귀한 줄은 알면서 남의 집(다른 민족) 딸, 아들은 저런 험한 일을 해도 된다는 것이 의아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철저하게 법으로 규제하는 성매매를 버젓이 허용한단 말입니까? 이런 것을 보더라도 인간의 인식이 변하고 넓어져서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기를 기도드립니다.”

 

“신부님 말씀을 듣고 나니,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할 때는 혼자의 얕은 생각으로 단정 짓거나, 한두 마디 들은 말에 얽매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교회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잘 배우고 묵상하여야겠습니다. 그렇지 않다가는 어설픈 이단에 빠지기 쉬울 것 같습니다.” 

 

“베드로씨가 점점 깊이가 있어지는 것 같습니다. 아주 옳은 말씀입니다. 자, 이제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성소수자에 대한 말씀을 들어보아야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8년 2월 25일, 백남해 신부]

 


[편펀 사회교리] (59)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 소수자 ⑩ 갖가지 불경과 불의 경고한 사도들

 

 

“캬~, 베드로씨! 봄기운도 완연한데 이런 날에는 산에 가서 동동주에 파전이 제격 아닙니까?”

 

백 신부의 이야기에 베드로가 정색을 하며 말한다.

 

“신부님, 지면 차지하려고 꾀부리지 마시고, 지난주에 이어서 신약성경에 나오는 성 소수자 이야기나 하시지요.”

 

“허 참, 사람이 낭만이 없어요. 알겠습니다. 먼저 로마서 1장을 보겠습니다.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18)… 이런 까닭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수치스러운 정욕에 넘기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여자들은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자연을 거스르는 관계로 바꾸어 버렸습니다.(26)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여자와 맺는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그만두고 저희끼리 색욕을 불태웠습니다. 남자들이 남자들과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다가, 그 탈선에 합당한 대가를 직접 받았습니다.(27)… 이와 같은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하느님의 법규를 알면서도, 그들은 그런 짓을 할 뿐만 아니라 그 같은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32)’라는 말씀처럼 신약성경은 분명하게 동성애를 하느님에 대한 불경한 짓이라고 말합니다. 또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도 ‘불의한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불륜을 저지르는 자도 우상 숭배자도 간음하는 자도 남창도 비역하는 자도, 도둑도 탐욕을 부리는 자도 주정꾼도 중상꾼도 강도도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1코린 6,9~10)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여기서 ‘비역’이라는 말은 ‘사내끼리 성교하듯이 하는 짓’을 말한답니다.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도 ‘그릇된 가르침에 대한 경고’를 합니다. 그 말씀을 들어보면 ‘불륜을 저지르는 자, 비역하는 자, 인신매매를 하는 자, 거짓말하는 자, 거짓 증언을 하는 자, 그리고 그 밖에 무엇이든 건전한 가르침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자 때문에 있다는 것입니다.’(1티모 1,10) 그리고 유다서간에서는 구약성경에서 보았던 고돔과 소모라의 죄를 거론합니다. ‘그들과 같은 식으로 불륜을 저지르고 변태적인 육욕에 빠진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변 고을들도,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아 본보기가 되었습니다.’(유다 1,7)이렇게 신약성경에도 성 소수자, 특히 동성애를 하느님께 대한 불경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 예수님께서 언급한 직접적인 말씀은 없나요?” 

 

“예.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동성애 문제나 성 소수자에 대해 하신 말씀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바오로 사도나 제자 유다 타대오의 서간입니다. 뭐 그렇다고 성경의 정신이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해석의 여지는 있어 보입니다.” [가톨릭신문, 2018년 3월 4일, 백남해 신부]

 

 

[펀펀 사회교리] (60)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소수자 ⑪ 성소수자도 교회의 사목 대상

 

 

“완연한 봄입니다. 그렇죠?!”

 

“신부니임~ 또 꾀부리지 마시고. 지난주 신약성경 말씀에 이어서 계속해 주십시오!”

 

“네. 성실한 나라의 베드로씨.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에서도 동성애에 대하여 단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몇몇 신학자들은 동성애에 대한 성경 구절이 잘못 번역되었거나 현대와 달리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당시 시대상을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후대 번역자들이나 필사자의 주관적인 편견이 작용되었을 수 있다고도 합니다. 이런 주장은 물론 가톨릭 교리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냥 무시하기는 어렵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 중 6장의 ‘종들에 관한 지침’(이전에는 ‘노예’라고 했습니다.)을 보면 ‘종살이의 멍에를 메고 있는 이들은 누구나 자기 주인을 크게 존경해야 할 사람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이름과 우리의 가르침이 모욕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를 주인으로 둔 종들은 그 주인이 형제라고 해서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주인을 더욱 잘 섬겨야 합니다. 자기들의 선행으로 덕을 보는 사람들이 사랑받는 신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고 권고하십시오.’(1티모 6,1~2)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도 존속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인용했던 구절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전쟁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이야기를 미국이든 어디서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인종차별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살던 시대에는 노예제도가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그 영향으로 성경도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권에 대한 의식이 넓어진 이 시대에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적 지향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입장이 절대 불변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제 개인적 답은 보류하겠습니다.”

 

“신부님 말씀 듣고 보니 참 함부로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시대의 가르침은 분명 동성애가 죄인데, 앞으로 어떻게 변할 지 누가 알겠느냐…. 뭐 그런 말씀이시죠?” 

 

“예,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가톨릭교회는 동성애 행위를 죄로 여기며 하느님께 대한 불경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렇지만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부당한 차별이나 박해를 하는 것은 분명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하고, 그들도 하느님 자녀로서 사목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변화 중 한 가지를 보아야겠습니다. 2014년에 열렸던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입니다. 이 기구는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선정된 주교들이 전체 교회와 관련된 중요문제들을 협의하여 교황을 보필하는 상설 기구입니다. 교황 바오로 6세의 자의교서에 의하여 1965년도에 창설되었습니다. 이 기구는 가톨릭 주교단 전체를 대표하며, 약칭 ‘주교 시노드’ 또는 ‘시노드’라고 합니다. 이에 관하여 다음에 이야기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8년 3월 11일, 백남해 신부]

 


[펀펀 사회교리] (61)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 소수자 ⑫ 용기를 갖고 새로운 도전에 대응해야

 

 

“지난주에 ‘세계 주교대의원회의’ 약칭 ‘시노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죠? 2014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시노드가 열렸습니다. 이 ‘시노드’는 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013년에 착좌하시고 처음 열린 ‘시노드’였습니다. 진보 인사들은 많은 기대를 가졌고, 보수 인사들은 심히 우려하던 ‘시노드’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기대와 우려가 뒤섞인 것이었습니다. 교황님의 지지와 함께 진보 신학자들은 동성애, 이혼 등을 포용하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하려고 했지만 보수적인 주교님들에 의해 무산되었습니다. 보고서 제출은 무산되었지만 교황님의 말씀들은 매우 의미심장하였습니다. “신은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래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가슴을 열게 해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용기를 갖고 많은 새로운 도전에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새로운 도전이란 많은 의미를 가지겠지만, 이날 말씀은 “우리는 지체하지 말고 항상 새롭게 하라는, 교회를 인도하는 성령의 힘을 느끼고 있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많은 사람의 상처를 보살피면서 새로운 희망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날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시복되셨는데, 이 분은 잘 알다시피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신 분입니다. 2차 바티칸공의회는 가톨릭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 현대 교회로 도약하도록 만든 위대한 사건입니다. ‘시노드’ 중에 바오로 6세 교황님의 시복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큰 상징성을 지닙니다. 2차 바티칸공의회에 버금가는, 새로운 세기에 주어진 문제들에 대하여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로 읽힙니다. 이런 분위기와 정신에 대해, 미국의 가톨릭 전문지인 ‘내셔널 가톨릭 리포터’는 ‘‘주교 시노드 최종 보고서에서 동성애자 문제 등이 제외됐지만, 교회에서 이 문제가 공개적으로 논의된 것 자체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승리며 그가 바랐던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입에 올리기조차 힘들었던 문제들, 성소수자, 낙태, 이혼, 피임 등에 대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들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입장은 확고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지혜를 구하며 기도하고 토론한다면 더 나은 삶에 대한 통찰이 생길 것이고, 소외된 이들 상처 입은 이들이 하느님 은총과 사랑을 더 많이 깨닫게 되지 않을까요?”

 

“신부님, 말씀하시고자 하는 큰 뜻은 알겠는데…. 요즘 너무 말이 길어지고 사변적으로 변합니다.”

 

“하하 베드로씨 저도 빠져 나갈 구멍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선지자나 순교자가 아닙니다. 그냥 어리석은 신부입니다. 하하” [가톨릭신문, 2018년 3월 18일, 백남해 신부]

 

 

[펀펀 사회교리] (62)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 소수자 ⑬ 동성애, 같은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지역과 종파 따라 조금씩 견해 달라

 

 

“지난주에 가톨릭교회의 새로운 길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세상 우리만 사는 것 아니잖아요?!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사상과 종교가 공존하는 것이 세상이잖아요. 그 중에서도 같은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교 종파들은 성소수자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의미 있겠습니다. 먼저 동방정교회를 보면 지역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주류인 동유럽 정교회들은 매우 보수적인 입장입니다. 반면 서유럽의 정교회는 우리와 비슷한 입장을 보입니다. 동성애 자체는 반대하지만 동성애자들 또한 하느님의 자녀이며 사목 대상으로 대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런 점은 매우 의미 있는 현상입니다. 교리보다는 지역 사회분위기가 동성애에 대한 생각을 달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시사점이 매우 큽니다.”

 

“그러네요, 신부님. 시대와 지역, 사회문화에 따라서 성소수자 문제는 차이가 나는군요. 하느님 사랑 외에는 결코 절대적인 것은 없는가 봅니다.”

 

“하하, 베드로씨가 이제 저보다 한 수 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성공회를 보면 차이가 더욱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공회의 원조인 영국성공회에서는 동성애자에 대해서 관대한 입장입니다. 게다가 자유의 여신상이 지키는 나라라서 그럴까요? 성소수자에 대한 미국성공회의 입장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사실 오늘 이 이야기가 하고 싶었습니다. 미국성공회 내 최초의 커밍아웃 양성애자 ‘진 로빈슨’ 신부가 2003년 주교 서품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전 세계 성공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는 당시 두 딸을 낳은 부인과는 이혼하고, 동성 파트너와 10여 년째 동거하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동성애자가 주교가 된다는 사실에 미국성공회 내에서도 문제가 되었지만, 특히 세계 성공회는 미국성공회와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경고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로빈슨 주교의 두 가지 사랑(Love, Free or Die)>이라는 영화로까지 제작되었고, 국내에서도 개봉되었습니다. 그러나 2013년 은퇴한 로빈슨 주교는, 최근 동성 배우자와 이혼했습니다. 그는 “동성 부부도 이성 부부와 마찬가지로 문제와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결혼에 대한 나의 신념엔 변화가 없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2009년에 미국 성공회 LA교구에서 레즈비언 사제 ‘메리 글래스풀’을 성공회 최초의 레즈비언 주교로 임명합니다. 이에 보수적인 주교들이 교회를 떠나는 사태까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성공회도 사회 참여 문제나 성소수자 문제 등에 있어서 매우 개방적이죠.”

 

“신부님, 문화 충격입니다. 다 같이 하느님을 믿는 교회고, 같은 뿌리에서 시작되었는데 동성애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다를 수가 있습니까? 역시 문화 차이가 동성애를 바라보는 차이에서 비중이 더 큰 것일까요?” [가톨릭신문, 2018년 3월 25일, 백남해 신부]

 

 

[펀펀 사회교리] (62)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 소수자 ⑭·끝 성적 취향 탓에 구원 받지 못한다고요?

 

 

오랜만에 원두를 갈아서 커피를 내리자 진한 향이 방안을 가득 채운다.

 

“베드로씨, 이 커피향처럼 제 방이 그리스도의 향기로 가득 차면 참 좋겠습니다.”

 

“하하, 신부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참 낯섭니다. 꼭 신부님 같습니다.”

 

“그래요, 칭찬으로 알겠습니다. 이제 긴 이야기를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얼마 전 방송됐던 EBS ‘까칠남녀’ 기억하십니까? 교육방송에서 이례적으로, 사회의 건드리기 힘든 부분인 페미니즘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죠. 그리고 생각보다 큰 사회적 파장 때문에 조기 종영이라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방송이 옳은가 그른가, 반대하여야 하는가 찬성하여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관여할 부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우리 사회가 이다지도 다양성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금기시 해왔는가?’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정신적으로는 무엇인가에 쫓기는 것처럼 조급하고 성급해졌습니다. 나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받아들일 수 없고,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면 없어져야 하거나 지워버려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예, 신부님 우리 사회가 많이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문제나 잘못이라기보다는, 먹고 살기 위해서 너무 빨리 달려왔고, 달려오면서 내 생각보다는 집단의식에 나를 너무 맡겨버린 결과 아닐까요? 뭐, ‘자유로부터 도피’라고나 할까요? 누군가 방향을 정해주거나 목표를 정해 주면 그 방향으로 가서 목표만 채우면 되는 시대에, 스스로 삶의 목적을 설정하고 알아서 길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보니 다른 사람들(대다수)이 하는 대로 하고, 많은 쪽이 옳다고 하면 그냥 따라가던 편한 시절을 다시 돌리고 싶어하는 것 아닐까요?”

 

“베드로씨 아주 좋은 분석입니다. 새로운 세상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옳고 그름이라는 것도 하느님 사랑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이 없는 정의는 자칫 폭력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사랑이 없는 신앙은 얼마나 더 무섭습니까? 잘못하면 ‘마녀사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정의가 없는 사랑은 무기력하거나 편향적이 되기 십상입니다. 조심해야죠. 우리는 누구든 하느님 사랑과 은총을 받지 않으면 구원될 수 없고,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죄인들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구원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앞에서 동등한 사람으로 서서, 서로 다른 점들은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서로 약점이 있다면 감싸주면서 기도하고 함께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성적 취향이 다르다고 해서 아예 구원에서 제외 시켜서야 되겠습니까? 교회가 성소수자들을 단죄하고 잘못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는 만큼, 사목자와 신앙인들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포용하는 너그러움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것이 큰 잘못일까요? 의문을 남기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8년 4월 1일, 백남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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