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합시다! 신앙교리] 공동체와 신앙생활 (1) 공동체 안에서의 신앙생활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공동체 생활은 한마디로 ‘신앙을 함께 사는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이 우리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인 것이지요. 우리 그리스도교 공동체 구성 원리가 되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그 공동체 생활의 핵심이 된다는 말은 당연한 말이겠습니다. 여가를 선용한다거나 사교생활을 하는 것이 교회 공동체가 아닌 것이지요. 신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좋은 뜻으로 출발한 모임이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의 의미와 목적을 잃고 일반 사회적인 모임으로 변질되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한 모임은 다른 새로운 교우들에 대하여 폐쇄적인 모임이 되어 결국 공동체에 알게 모르게 해를 끼치는 그래서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나을 모임으로 전락되기도 합니다. 어떤 모임은 이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교우보다 쉬는 교우가 더 많은 상태에서 아예 모임을 성당 울타리 밖에서 갖는, 신앙과 무관하게 모임이 지속되는, 정체를 알 수 없이 그들만의 집단이 되는 기이한 모임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교 모임은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어디까지나 신앙생활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또 신앙생활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져야 합니다. 공동체적 신앙생활과 사랑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신앙은 단순한 믿음과는 크게 다른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뿐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까지도 포함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공동체를 위한 신앙생활에서 사랑의 실천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계명을 제일가는 계명으로 주셨고, 그 계명은 우리의 첫째가는 소명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소명에 있어서의 형제적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뗄 수 없이 매여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 그것이 말처럼 쉽지를 않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들의 모습이 우선 내 맘에 들지를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을 주님 안에서 사랑해야 할 것인데, 이 일을 어떻게 할까요? 그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는 없을까요? 고등학생 아들을 둔 어떤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는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이 차려입고 다니는 옷 스타일이 영 마음에 들지를 않았습니다. 아들의 옷 모양은 너무 개성에 넘쳐 엄마의 눈에는 도무지 부끄럽기 짝이 없었고, 그래서 늘 말다툼과 꾸중으로 둘 사이는 긴장되어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아들에 대해 불만이었던 그 어머니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들의 삶은 자신에게 잠깐 동안 맡겨진 선물이며, 자신이 영원히 붙들어 둘 수 없는 성격의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 것이지요. 그 어머니는 만일 자신의 아들이 내일 죽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이제 아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아들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아들을 사랑하게 되면서 그제야 참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더 이상 아들을 완벽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고, 아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사랑스럽다는 걸 알게 된 어떤 어머니의 이야기였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내가 만나는 형제자매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선 이야기의 어머니처럼 내 주위의 형제자매들은 내가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고유의 인격체임을, 아울러 그들이 내일이라도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과 영원한 만남을 이룰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요? 우리는 가능한 한 형제자매들에게서 단점보다 장점을 더 보려고 애써야 하겠습니다. 장점이 더 많이 보이면 좋겠지만, 단점이 더 많이 보인다면, 그 장점을 보고라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사람들을 사랑하신 시각도 그러했던 것 아닐까요?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생활 바른 신앙생활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생활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신앙생활을 잘 해보겠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이행할 굳은 뜻이 없다면 어떠할까요? 그런 내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 예수님께서는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 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주님의 뜻에 순명하는 사람이 바로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이는 또한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는 신앙인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뜻과 계명에는 교회 공동체의 가르침과 규율도 포함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대한 신앙생활은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충실로 이어지는 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의 기초인 기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결합된 신앙생활은 기도를 통하여 윤택하게 되고 견고하게 됩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의 기초이고, 그 신앙생활이 공동체 생활의 핵심이므로 기도에 있어서도 공동체성이 중요합니다. 기도는 혼자만이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 공동체 안에서 할 때 더 힘 있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다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이 말씀처럼 우리가 함께 기도하기 위한 곳이 성당인 것이고, 그 성당 안에서 우리의 공동체적 신앙생활이 이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만 기도하지 말고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을 위하여서, 나를 넘어서서 더 많고 넓은 대상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곧 우리의 가정, 작업장의 동료, 친구와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며, 교황님과 주교님과 신부님들, 남녀 수도자와,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이를 위해서도 기도하며,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가 한 목자 아래 있게 되도록 교회 밖에 모든 이, 친척과 은인, 안면이 있던 사망자와 연옥의 모든 영혼, 원수와 박해자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과 가정공동체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이들이 서로 결합하여 가정을 이루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즉 인간은 홀로가 아니라 공동체로서 살도록 창조되었는데, 그 중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가 부부와 자녀를 구성원으로 하는 가정인 것입니다. 따라서 가정 자체가 신적(神的)인 기원을 지닌다고 할 수 있고, 이 가정이 우리 생명의 원천이고, 사고하기를 배우는 학교이며, 기도하기를 배우는 첫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생활을 제쳐두고 교회 공동체만을 위해서 투신한다는 것은 결코 잘하는 일이라 할 수 없겠지요. 레지오 단원여러분! 행복한 가정의 바탕은 무엇보다 부부의 사랑에 있습니다. 부부의 사랑이 기본이 되어야 그 가정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부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1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목국장)] [공부합시다! 신앙교리] 공동체와 신앙생활 (2) 하느님과의 친교에 봉사하는 교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시며, 사랑으로 일치하시는 분, 곧 친교의 하느님이십니다. 그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과의 친교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친교로 부르시고, 또 우리가 그 친교 속에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친교의 하느님께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교회는 친교의 하느님께 봉사합니다. 교회는 하느님과 사람과의 친교를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이며, 이 교회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과의 친교와 사람들과의 친교의 삶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를 당신과의 친교로 불러 주시고, 친교의 공동체인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해주신 하느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립니다! 친교의 삶을 살아가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는 우리들이기에, 우리 각자는 교회 공동체 내에서부터 친교 나누기를 힘써야겠습니다. 나 자신부터 구성원들 간의 친교를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서 사랑의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친교의 공동체를 위하여 내 자신이 이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결코 짐스러워함이 없이, 함께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함께 살도록 창조된 나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나는 영원한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그분께로부터 나의 생명을 선사 받았습니다. 존재하지 않았던 내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었던 내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고귀한 생명을 누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나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은혜까지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나는 홀로 이 세상에 던져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벌써 나의 삶 자체가 다른 사람의 활동과 도움과 사랑을 통해서 가능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이들과 함께 살라는 것, 서로 사랑하며 도우며 더불어 살라는 것, 이는 하느님의 뜻이고 우리 인간의 공통된 희망이기도 합니다. 함께 하는 신앙생활의 어려움 나의 존재자체만 남들과 함께 살도록 질서 지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앙생활도 그러합니다. 내가 가진 신앙은 그 누군가로부터 전해 받은 것입니다. 나의 신앙은 결국 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에서 유래한 것이고, 그것을 내가 공동체로부터 전해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내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요, 내가 세속의 이름 이외에도 세례명으로 불리는 것은 내가 교회 공동체의 엄연한 일원이 되었다는 표시라 할 것입니다. 다른 이와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모든 신자가 다 같은 신앙일 수가 없고, 모든 신자가 다 사랑에 젖어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신자가 다 똑같은 의견일 수도 없고, 모든 신자가 다 남을 헤아리고 배려할 수가 없습니다. 함께 하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갈 수많은 점들이, 함께 하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걸림돌과 문제들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저희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교회 공동체는 아무런 문제도 어려움도 없는 성인들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는 뚜렷한 문제의식을 지닌 보통 사람들의 공동체이며, 수많은 결점들과 죄성을 지닌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그 공동체에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있고, 형제자매들에 대한 용서와 화해와 사랑이 있으며, 은총을 주는 성사가 있습니다. 공동체의 건설을 위한 나의 역할과 자세 이 공동체에 내가 속해 있습니다. 이 공동체에서 나는 나의 신앙을 받고 그 신앙을 성숙시켜 나갑니다. 이 공동체에서 나는 사랑을 배웁니다. 나는 이 공동체와는 별 상관없이 이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나를 이 공동체에서 제외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 공동체에 의해 선택되었고, 그러면서 이 공동체에 파견된 존재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나를 보내셨습니다. 이 교회 공동체에서 내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당신을 섬기고 갈 것을, 그리고 내가 이 공동체 안에서 이 공동체를 통하여 당신을 전파할 것을 원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서로 사랑하라! 나를 전하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교회 공동체 내에서부터 지켜져야 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선 나에게서부터 이루어져야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지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나에 대한 하느님의 부르심과 파견은 교회 공동체의 건설로 이어지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나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공동체 내에서 다른 이들이 가진 고유한 자리를 알고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주장과 소리만을 높이려고 하기보다, 다른 이들이 가진 장점과 그들이 말하는 바에 숨어있는 옳은 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획일성과 통일성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인정하고 조화시켜 나가면서, 그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뤄야 합니다. “공동체는 골치가 아파. 나는 주님하고만 있고 싶다.” 혹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지만 주님과 함께 하고 싶다면, 공동체와 함께 해야 합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설령 공동체가 나의 바람과 다른 길로 나가고 있다고 느껴질지라도, 그를 외면하거나 멀리해버리는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그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고, 그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며, 희생하는 마음으로 함께 하는 적극적인 자세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에게 교회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소중한 공동체라는, 그리고 내가 이 공동체에 속해있다는 의식이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나를 이 공동체에 파견하셨음을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습니까? 나는 이 공동체 속에서 기뻐하고, 때로는 슬퍼하거나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역으로 공동체도 나에게서 기쁨과 분노와 슬픔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나와 공동체는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입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이 공동체의 일원이기에, 나의 말 한마디, 나의 행동 하나 하나가 결코 공허한 메아리일 수가 없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남과 더불어 있는 나이기에, 나의 모든 것이 공동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작은 희생과 협력, 사랑의 마음이 공동체를 조금씩 변화시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레지오 단원 여러분! 함께 가지 않는 길은 멀고 힘들고, 함께 하지 않는 공동체는 지겹고 짜증스럽고 역겹기만 할 뿐입니다. 그 길에, 그 공동체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자세로 공동체를 살 것입니까?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2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목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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