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따라 걷기] 넷째 계명 :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섬김의 길 섬김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섬기러 오신 분을 섬김으로써 섬기러 오신 분의 섬김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섬기러 오신 분을 닮아 모든 이를 섬김으로써 섬기러 오신 분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섬김은 함께함입니다. 쓰러져 뒤쳐진 이를 일으켜 세우고 부족한 이의 모자람을 채우며 아픈 이를 온전하게 하려고 가던 길 멈추어 그와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섬김은 치열한 경쟁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섬김은 돌봄입니다.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작고 약한 이들과 누군가의 돌봄에 삶을 맡길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섬김은 권력자의 통치와 다릅니다. 섬김은 살림입니다. 섬김을 받는 이가 더욱 그다울 수 있고 고유한 삶의 꽃을 활짝 피울 수 있도록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 썩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섬김은 자신을 위한 다른 이의 피어린 희생을 마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창조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과 하느님을 닮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이를 섬기러 오신 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고 섬김의 삶을 통해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하늘에 계신 한 분 아버지, 그리고 땅의 아버지들과 어머니들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마태 23,9). 그렇습니다. 우리, 아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을 낳아 주신 한 분이신 아버지요 어머니이신 창조주 하느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땅의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을 통해서 우리를 낳으십니다. “마음을 다해 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고 어머니의 산고를 잊지 마라. 네가 그들에게서 태어났음을 기억하여라. 그들이 네게 베푼 것을 어떻게 그대로 되갚겠느냐?”(집회 7,27-28). 하느님이 조금은 희미하게 느껴지는 우리 존재의 뿌리라면, 우리의 부모는 생생하게 맞닿아 있는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자 한다면, 우리가 존재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뿌리이신 하느님을 정성껏 섬겨야 하듯, 우리를 직접 낳아 주신 부모를 성심껏 보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십계명 가운데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처음 세 계명의 으뜸이듯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사람을 포함한 이웃에 대한 나머지 일곱 계명의 으뜸이 됩니다. 하느님을 흠숭하고 부모에게 효도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긍정하고 존중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 모두에 대한 하나의 계명 부모가 자녀를 낳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가장 큰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자녀는 언젠가 부모가 됩니다. 사람은 부모가 됨으로써 하느님 창조 사업의 가장 빼어난 협조자가 됩니다. 오늘의 자녀는 내일의 부모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자녀일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부모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생명의 은총을 느끼고, 자녀는 부모에게서 창조주 하느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부모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으로 자녀를 돌보고, 자녀는 하느님을 모시듯 부모를 공경합니다. 이럴 때 부모와 자녀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을 때만 부모인 것은 아닙니다. 늙고 병들어 자녀들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고, 그저 짐처럼 다가올 때조차 부모입니다. 정신적 물질적으로 자신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어찌 보면 생존 본능일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자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될 뿐만 아니라 홀로 인간적 존엄을 지키기도 힘겨운 상황에 놓인 부모를 모시는 것, 곧 “부모가 인간다운 품위와 존엄을 지키면서 그리고 자유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부모를 보살피는 것”(안젤름 그륀, 「인생을 떠받치는 열 개의 기둥」, 송안정 옮김, 21세기북스)이 바로 참된 효도이고 공경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자녀는 부모의 심심풀이 화풀이의 대상이나 정신적, 육체적, 성적 학대의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맡긴 하느님의 고귀한 선물이요, 존엄한 인격체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제멋대로 자녀를 다루어서는 안 되고, “자녀들을 성나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에페 6,4) 양육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모든 이에게 해당하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라는 황금률이 특별히 빛을 발해야만 합니다. 다시 섬김의 길을 걸어요 넷째 계명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요한 13,1-20 참조)처럼 부모는 자녀를 섬기고, 부모에게 순종하신 예수님(루카 2,51 참조)처럼 자녀는 부모를 섬기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노트커 볼프 아빠스는 이 넷째 계명이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지향과 한 가지 약속을 제시한다고 말합니다. “첫째 지향은 부모가 자식에게 존중과 공경을 받게끔 살아야 합니다. 둘째는 장성한 자식이 연로한 부모를 영적으로 빈곤하게 살아가지 않게 하고, 부모의 결점을 존중하고 잘못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젊음에 광분하는 세태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넷째 계명은 이렇게 약속합니다. ‘늙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언제까지나 젊고 건강하고 매력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너희에게 있는 약점과 결점을, 매일같이 마주치는 부족하기만 한 구석을 인정하라. 조금씩 너희 삶을 놓아 주어라. 아무 염려하지 말고 이 세상을 다른 이들 손에 맡겨도 된다’”( 「그러니, 십계명은 자유의 계명이다」, 윤선아 옮김, 분도출판사). 먼저 “남녀가 사랑과 생명을 전달하며 헌신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자연적 사회”이며 “사회생활의 근원적 세포”(가톨릭교회 교리서, 2207항)인 가정을 이루는 부모와 자녀가 서로에게 지켜야 할 넷째 계명은 더 넓은 가정, 곧 시민 사회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넷째 계명은 또한 우리의 선익을 위해 사회 안에서 하느님께 권위를 부여받은 모든 사람도 존경할 것을 명합니다. 넷째 계명은 공권력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과 그 공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의무도 밝혀 줍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234항).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가정뿐만 아니라 우리가 속한 크고 작은 공동체 안에서 나와 너 우리 모두를 살리는 섬김의 길을 걸어요. 앞선 세대가 다음 세대를 기르고 다음 세대가 앞선 세대를 보살피며, 공동체는 개인을, 개인은 공동체를 섬김으로써 모든 이가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말이에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님(마태 20,28 참조)과 함께, 예수님처럼…. * 상지종 베르나르도 - 의정부교구 신부. 의정부교구 제8지구장 겸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8년 5월호, 상지종 베르나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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