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교리] ‘원죄’-‘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의 상실’ (1) 하느님께서는 흙의 먼지로 빚으신 ‘육체’에 당신 생명의 숨, 곧 ‘영혼’을 직접 불어넣어주시어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비슷하게’ 그리고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심으로써 당신과 친교를 이루며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분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만이 그분과 친교를 누리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에덴에 동산을 꾸미시어 거기에 살게 하셨다는 성경의 표현은(창세 2, 8 참조) 우리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과 얼마나 친근한 관계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친교를 바탕으로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죽지도 않고 고통도 당하지 않았습니다.(창세 3,16-19 참조) 이렇게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교회는 ‘원초적 거룩함의 은총’(가톨릭 교회 교리서 375항)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는 이 은총은 사람이 하느님께 자유롭게 순명함으로써만 누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느님과 아무리 친근한 관계였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였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은 당연히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창조 질서 아래 놓여 있고 이를 반드시 지켜야만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지 말라는 금지령은 이 창조 질서를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세 2,17)는 피조물인 인간이 자유로이 인정하고 창조주를 향한 절대적인 신뢰로써 지켜야 할, 넘어서는 안 되는 한계를 상징적으로 환기시켜 줍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96 참조)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 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마에게 유혹을 받은 인간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창조주를 향한 신뢰가 죽게 버려두었으며, 자신의 자유를 남용함으로써 하느님의 계명에 불순종”(가톨릭 교회 교리서 397항)하고 맙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원죄’를 범하고 맙니다. 그러니까 ‘원죄’의 시작은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의 결핍입니다.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질서는 모든 피조물에게, 특히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되어 당신과 친교를 나누며 영원히 함께 살기 원하셨던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하고 좋은 것이라고 신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신뢰의 결핍이 의심과 불순종으로 이어집니다. 서로에 대한 절대적 신뢰 안에서 누리던 친 교는 깨어지고, 그 친교에 힘입어 누리던 ‘원초적 거룩함’의 은총을 상실함으로써, 인간은 이제 고통을 당하고 죽어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의 금지령이 아니라, 창조 질서 아래 놓여 있는 사람을 지키고 살리기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특권에 집착하시는 분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하느님을 신뢰하기는커녕 오히려 두려워하였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39항 참조) 그리고 그 두려움을 이겨내려면 하느님처럼, 아니 하느님보다 더 높이 되어야한다고 착각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만드셨고, 사람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2018년 6월 17일 연중 제11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영우 베네딕도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장)] [생활교리] ‘원죄’-‘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의 상실’ (2)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어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며 살던 아담과 하와는 ‘원초적 거룩함’의 은총과 함께 ‘원초적 의로움’의 은총도 누리고 있었습니다. ‘원초적 거룩함’의 은총이 창조주이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은총이라면, ‘원초적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은총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 1,28)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릴 권한을 사람에게 주셨는데, 그 권한을 잘 행사할 수 있도록 함께 주신 은총이 바로 ‘원초적 의로움’입니다. ‘원초적 의로움’은 한마디로 ‘조화’의 은총입니다. “인간의 내적인 조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조화, 그리고 첫 부부와 다른 피조물들 사이의 조화, 우리는 이 모두를 한마디로 ‘원초적인 의로움(原義)’이라”(가톨릭 교회 교리서 376항) 부릅니다. 이는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맺는 관계의 세 가지 차원에 들어맞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 다른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 안에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원죄를 범하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이 세 가지 차원의 모든 관계에서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 조화를 바탕으로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맡기신 세상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이 ‘다스림’의 시작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 ‘자기 다스림’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관능적 쾌락,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 반이성적 자기주장 등 이 세 가지의 욕망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인간은 흠 없고 질서 잡힌 존재”(가톨릭 교회 교리서 377항)였고, 다른 사람뿐 아니라 피조물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그곳을 일구고 돌보며”(창세 2,15) 사는데, 그 노동은 고역이 아니라, 오히려 보이는 피조물을 완전하게 하고자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께 협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원죄’를 범함으로써 그들이 ‘원초적 의로움’으로 누리던 모든 조화는 파괴되고 맙니다. 가장 먼저 육체에 대한 영혼의 지배력, 즉 ‘자기 다스림’이 손상을 입게 됩니다. 이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고 나서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창세 3, 7)는 성경의 표현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납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조화 역시 깨어지고 그들의 완전한 결합은 갈등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됩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라는 남자의 핑계 안에서 우리는 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후 남자와 여자로 대표되는 모든 인간관계는 탐욕과 지배욕으로 얼룩지게 됩니다. 피조물들과 이루는 조화도 깨어지고 맙니다. 보이는 피조물은 인간에게 낯설고 적대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양식으로 주신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창세 1,29)는 사라지고 고통 속에서 땀을 흘리며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돋아 난 땅을 부쳐야 양식을 얻을 수 있다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창세 3,17-19 참조) ‘원죄’의 결과는 이렇듯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의 상실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세례성사를 통해 ‘원죄’를 용서해주심으로써 이 ‘거룩함과 의로움’의 은총을 다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2018년 7월 22일 연중 제16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영우 베네딕도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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