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찾아서 – 기도]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 우리는 보통 마음의 평화나 정서적인 위안을 바라고, 또는 시험에 붙는 것과 같은 실제적인 성과를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기도에 대해 말할 때 기도가 잘되고 못되고, 기도 내용이 실현되고 안 되고 등을 따지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전철이나 버스에서 묵주를 쥐고 기도하시는 분들을 종종 목격하면서 기도에 대해 단순한 한 가지를 확인합니다. 기도는 그 분위기나 결과에 앞서 먼저 ‘꾸준히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경험 ‘꾸준함’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기도에 대한 이해는 사실 부모님에게서 비롯합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기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 채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조금만 관심이 있었다면 꾸준히 시간을 할애하여 기도하셨던 아버지를 통해 수도원에서 일상적으로 하는 성무일도를 진작 배워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책을 들고 하시던 기도가 무엇인지 당시 저는 궁금하지 않았었지요. 어머니도 묵주 기도를 늘 열심히 바치셨습니다. 부모님 덕에 기도는 ‘충실히 해야 하는 것’임을 몸소 배웠던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수도원에 들어와 기도는 ‘하느님과 친분을 쌓는 일’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 수련」에서 성경의 여러 장면을 가지고 상상을 통해 기도하도록 안내합니다. 한 장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는 의미에서 관상 기도라고 할 수 있는 이 기도는 때때로 매우 실감적인 상상의 현장으로 인도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곳에서 생동감 넘치게 예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도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또는 성모님과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이런 요소들이 기도하는 이로 하여금 하느님을 체험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이냐시오 성인이 알려 준 대로 관상 기도에 필요한 것은 내가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공간에 함께 있다는 인식입니다. 공간에 관한 집착은 성인이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이스라엘의 갈릴래아 지방과 예루살렘 등지를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데서 비롯합니다. 성인은 늘 주님과 같은 공간에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런 영향으로 이냐시오 영성을 따르는 이들은 현장성을 중시합니다. ‘내가 있는 곳에 주님께서도 함께하신다.’는 인식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이 그러했듯이, 공간적인 일치와 대화를 통해 우리 또한 하느님과 친분을 키워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냐시오의 영성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은 관상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저도 수련기에 집중적으로 이 기도를 배우게 되었는데, 이상하리만큼 떠오르는 장면이 없어서 매우 애먹었습니다. 특히 한 달 침묵 피정 중에 경험했던 그 메마름은 이냐시오의 영성이 저와는 맞지 않는 옷인 듯 저를 몰아갔습니다. 성당에 머물며 기도를 해도 예수님이 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밖에 두고 온 친구들과 어울렸던 일들이 생각나고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지면서 잡념의 나래를 펴기 일쑤였습니다. 저의 기도 체험을 가지고 영적 지도 신부님과 하루에 한 번씩 면담해야 하는데 할 말도 없었지요. 이런 일이 며칠 계속되다 보니 신부님은 단식을 권유하며 저를 좀 더 강하게 밀어붙이셨습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하는 데도 기도 안에서 특별히 건져 올릴 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실망한 나머지 급기야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정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 장면이 제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주눅이 들어 잔칫집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제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한 손에는 포도주 잔을, 다른 한 손에는 포도주 병을 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포도주를 한 잔 따라 주시며 ‘마셔라, 기운 내라.’ 하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얼굴은 살짝 붉은 기운을 띠고 있었습니다. 비록 제 내적인 상태는 집으로 돌아가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지만, 예수님의 그 말씀은 제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설령 기도 중에 이런 위안이 없다고 해도 별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면서도 그때는 위로가 필요했었습니다. 성찰 떠나야겠다는 마음속 유혹에는 결국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기도에서 건져 올린 것은 별로 없지만, 함께 입회한 형제들이 좀 더 살아보자고 권했기 때문입니다. 한달 침묵 피정을 마치고 그 동기들과 음성 나환자촌에 한 달 동안 실습을 나갔습니다. 실습 내내 행복했습니다. ‘이런 행복감이 기도에서는 어찌하여 자주 오지 않았을까?’ 그건 나의 일방적인 기대였으며, 하느님의 응답은 나의 기대와는 다른 시간에 다른 방식으로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모든 사람에게 이냐시오 성인이 알려 준 관상 기도가 잘 어울리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실 이냐시오 성인은 모든 사람이 그런 기도를 해야 한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에 힘과 깊이를 더해 주는 기도는 어느 것이나 ‘영신 수련’으로 볼 수 있기에 각자 자신에게 걸맞은 기도 방법을 찾는 게 바람직하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영신 수련은 양심을 살피는 방법이나 묵상, 관상, 염경, 묵도 등의 영적인 단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체력을 키우려고 근육을 단련하고 신체적 활동을 하듯이 이냐시오 성인은 기도와 같은 활동을 통해 영적인 근육도 단련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영신 수련」, 5항 참조). 돌이켜 보면 양심을 살피는 훈련도 당연히 영신 수련의 하나이고 이것을 토대로 식별할 수 있는 능력도 키울 수 있는데, 저는 이런 관상 기도를 제대로 못한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했던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퇴회까지 고려했으니, 기도하기가 무척 싫었던 모양입니다. 수도자로 살아가는 것이 매우 지루하고 편치 않으리라 지레짐작했기에 상대적으로 세속의 삶에 더 매력을 느꼈었나 봅니다. 이러한 내적인 상태가 겉으로는 무미건조한 기도로 포장되었고 그러다 보니 퇴회에 대한 유혹도 커졌나 봅니다. 이 유혹에 쉽게 굴복하지 않은 것은 앞서 말했듯이 동기들의 만류가 현실적인 도움을 줬기 때문입니다. 제가 내려야 할 결정에 대해 성찰하면서 저 자신도 뭔가 옳지 않다고 감지했던 분위기는 제가 받고 있던 스트레스였습니다. 곧 기도가 제가 기대하는 것만큼 안 된다는 이유로 스트레스가 쌓였습니다. 그런데 퇴회와 같은 중대사를 이런 까닭으로 결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스트레스에 시달렸지만, 그것은 나름 냉철한 이성이 알려 준 방향이었습니다. 일단 ‘결정을 내리지 않기’로 한 것이 당시 저의 결정이었습니다. 좀 더 살면서 두고 보는 것이 낫겠다 싶었습니다. 그 덕에 지금까지 살면서 하느님께서 제가 수도원에 남기를 바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싶다는 기도의 응답은 기도를 통해 주님의 목소리로도 들을 수 있지만, 나를 둘러싼 다양한 사람과 사건을 통해서도 이루어집니다. 경험상 후자가 더 일반적입니다. 수도 생활을 하다 보니 제가 관상 기도란 것을 아예 못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은 기도 중에 특별히 보이는 것이 없었지만 또 어떤 날에는 매우 생생하게 주님의 표정을 보며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기도란 하고 안 하고의 문제이지 잘하고 못하고를 평가할 일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확인한 셈입니다.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기보다 내 기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헤아려 보는 게 좋겠습니다. 실천 기도를 정의하자면 기도란 ‘하느님과 친분을 쌓는 행위’라고 하겠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느님의 뜻이 지상에서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알아가는 작업이며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영적인 힘을 키우는 수련입니다. 이 영적인 힘이 기도하는 이들에게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을 줍니다. 영적인 수련을 통해 기도가 일상이 되고, 일상을 되돌아보는 작업이 다시 기도가 된다면 우리는 개인이 맺고 있는 여러 관계와 일상의 사건 안에서 언제나 하느님을 찾아낼 것입니다. 그분과 늘 이야기를 나누고, 이웃과 함께 그분의 뜻을 실현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묵주 기도를 하는 신자분들은 자신이 수련하고 있는 상태란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분들은 보통 기도에 어떤 지향을 가지고 있지요. 자신이 성취해야 할 것을 위해 기도하거나 누군가를 위해, 공동체가 이뤄야 할 가치를 위해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이 선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가장 큰 선물은 곁에 계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 가고 그분과의 우정이 나날이 깊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 박종인 요한 - 예수회 신부. 청소년 사목을 맡고 있으며, 서강대학교에서 ‘성찰과 성장’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교회상식 속풀이」를 펴냈다. [경향잡지, 2018년 6월호, 박종인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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