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프란치스코 교황의 십계명 교리: 휴식의 날, 해방의 예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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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9-27 | 조회수4,913 | 추천수1 | |
십계명에 관한 교리 : 휴식의 날, 해방의 예언 “최악의 노예는 ‘자아(自我, ego)’입니다”
교황은 9월 12일 수요 일반알현을 통해 신명기의 세 번째 데칼로그(Decalogo, 열 가지 말씀들, 십계명)를 언급하면서 십계명에 관한 교리 교육을 이어 나갔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교리 교육은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 곧 휴식의 날에 대해 계속 이어가 보겠습니다. 탈출기에서 공포된 데칼로그(Decalogo, 열 가지 말씀들)는, 소중한 차이점이 나타나는 세 번째 계명을 제외하고는, 신명기에서 거의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탈출기에서는 휴식의 동기가 창조활동의 축복인데 반해, 신명기에서는 노예생활에서의 해방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 날에는 노예도 해방의 파스카를 기념하기 위해 주인처럼 쉬어야 합니다.
실제로 노예들은 규정에 따라 쉴 수 없습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많은 종류의 노예가 있습니다. 우선 억압과 폭력에 사로잡힌 삶이 있고, 여러 유형의 불의와 같은 외적인 제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심리적 어려움과 콤플렉스, 그리고 성격적 한계와 같은 여러 종류의 내적인 감옥들이 존재합니다. (누군가) 이러한 상태에 처해 있다면 휴식이 가능할까요? 투옥되거나 억압받는 사람이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내적인 어려움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사실, 감옥에 있어도 커다란 마음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어두운 탄압(이 있던 강제수용소)를/을 빛의 장소로 바꾼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San Massimiliano Kolbe) 신부님이나 반 투안(Van Thuan) 추기경님과 같은 분들을 생각해 봅시다. 게다가 비록 내적인 허약함을 가졌지만 자비의 휴식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전파할 줄 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느님의 자비를 만날 때 여러분은 커다란 내적 자유를 가지게 되며, 그것을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느님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자유란 무엇입니까? 선택의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까? 선택의 자유는 분명히 자유의 일부분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모든 남녀에게 보장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73항 참조).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훨씬 더 광대합니다.
실제로, 감옥이나 공황상태, 그리고 그 어떤 종류의 강요보다 더 구속적인 노예상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아(ego, 에고)의 종’입니다. 자아를 보기 위해 하루 종일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자아는 그들의 육체를 지배합니다. 그들은 자아의 노예입니다. 자아는, “사소한 법에 대한 위반이 아니라 존재의 실패, 그리고 노예 상태인 ‘죄’라고 불리는 가장 심한 억압을 행하며, 어디에서나 사람을 고문하는 고문관이 될 수 있습니다”(요한 8,34 참조). 죄는 결국 자아를 말하고 자아를 만듭니다. “나는 이것을 하고 싶다. 이것을 하는데 있어서 한계와 계명과 사랑이 있건 없건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인간의 욕망 안에서의 자아를 생각해 봅시다. 식탐이 있고, 음란하고, 탐욕스럽고, 노여워하고, 질투하고, 나태하고, 교만스러움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들은 그들을 압제하고 괴롭히는 자기 악덕의 노예들입니다. 식탐을 탐하는 사람과의 휴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식탐은 배가 부르지만 비어 있다고 믿게 만드는 위장의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위선적인 위장이 식탐을 불러 일으킵니다. 우리는 위선적인 위장의 노예입니다. 즐기는 것만으로 사는 식탐 있고 음란한 이들에게는 아무런 여지가 없습니다. 소유하려는 걱정은 타인들에게 피해를 주면서 항상 돈을 모으는 탐욕스러운 사람을 파괴시킵니다. 노여움의 불과 질투의 좀벌레는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저술가들은 질투가 간염에 걸린 사람처럼 몸과 영혼을 노랗게 한다고(병들게 한다고) 썼습니다. 질투하는 사람들은 병든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건강한 영혼의 신선함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질투는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나태함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 갈 수 없게 만듭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자신과 이웃 사이에 도랑을 팝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렇다면 누가 진정한 노예입니까? 휴식을 모르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누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까? 이 모든 악덕과 죄와 이기주의가 우리를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며, 우리가 사랑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노예이며,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항상 이웃을 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계명은 우리를 휴식 안에서 해방을 기념하라고 초대합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인간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 죄의 내적 종살이를 깨뜨리시는 주 예수님의 예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참된 자유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소유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관계를 재정립하고, 이웃을 환대하고 가치롭게 하며, 모든 노력을 즐거운 선물로 바꾸며, 친교를 나눌 수 있게 합니다. 또한 사랑은 약하고 제한적이라 하더라도, 감옥 안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구세주로부터 받은 자유입니다.
[바티칸 뉴스, 2018년 9월 1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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