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에 관한 교리 : 사람을 죽이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십니다. 낙태는 인간적이고 문명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일반알현에서,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인간생명의 수호를 다시 한 번 호소했다. 교황은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아픈 어린이와 모든 힘없는 노인, 희망을 잃은 모든 이민자와 깨지기 쉽고 위협받는 모든 생명 안에서 우리를 찾고 계신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하느님은 생명을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교리 교육은 ‘열 가지 말씀(Decalogo, 데칼로그, 십계명)’의 다섯 번째 말씀, 곧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인 “사람을 죽이지 마라”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벌써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십계명의 두 번째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계명은 간결하고 명료한 형식으로 인간관계의 기본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성벽과도 같습니다. 인간관계의 기본적인 가치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생명의 가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행해지는 모든 악은 ‘생명에 대한 경시’ 안에 요약돼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은, 우리가 신문에서 읽거나 뉴스에서 많이 접하는 것처럼, 전쟁과 인간을 착취하는 조직에 의해, 피조물에 대한 남용과 쓰고 버리는 문화에 의해, 인간 존재를 기회포착의 계산 밑에 두는 모든 시스템에 의해 공격 당합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살고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 경시입니다. 말하자면 이는, 어떤 측면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모순된 접근법은, 다른 권리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어머니 태중에 있는 인간생명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태어남에 있어서 무고하고 힘없는 생명을 빼앗는 행동이 어떻게 치료적이고 문명적이고 또는 단순히 인간적일 수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생명을 “빼앗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암살자를 채용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인간을, 비록 힘없는 아이라 할 지라도, “죽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는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암살자를 채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은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폭력과 생명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어디서 생겨납니까? 두려움으로부터 생겨납니다. 사실, 다른 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개인주의에 대한 도전입니다. 예를 들어, 한 생명이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알았을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이와 같은 극단적인 경우에, 부모들은 이해할 수 있는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주변 사람들의) 진정 어린 친밀감과 연대감을 필요로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주 임신을 멈추라는 경솔한 조언을 받습니다. 곧, “임신을 멈추라”고 말하는 것은 직접 “한 사람을 죽이라”는 의미입니다. 병든 아이는, 도움이 필요한 노인이나 살아가고자 애쓰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처럼, 이 세상에서 도움이 필요한 다른 모든 사람과 같습니다. 문제라고 생각되는 남녀 모든 사람은 실제로, 자기 중심주의에서 자기 자신을 나오게 하고 사랑 안에서 자기 자신을 성장하게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취약함에 노출된 생명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 안에 갇힌 삶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사랑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이 시점에서 잠시 (생명수호에 헌신하고 있는) 많은 자원 봉사자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힘있는 이탈리아 자원 봉사단에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생명을 거부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의 우상들입니다. (이 우상들은)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생명을) 제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돈, 그리고 권력과 성공입니다. 이것들은 생명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잘못된 척도(기준)입니다. 진정하고 유일한 생명의 척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척도입니다. 모든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바로 그 척도입니다. 사실, “사람을 죽이지 마라”는 계명의 긍정적 의미란 무엇입니까? 그 의미는 바로 방금 전에 성경 봉독을 통해 들은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 상에서 배척 받으시고 나약함과 가난과 고통을 받아들이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어떻게 대우 받으셨는지에 따라(요한 13,1 참조), 생명의 비밀이 우리에게 밝혀졌습니다. 모든 병든 아이와 모든 허약한 노인, 희망을 잃은 모든 이민자와 약하고 공격받은 모든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기쁨을 드러내 보여 주시기 위해, 우리를 찾고 계시며(마태 25,34-46 참조), 우리의 마음을 찾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피로 해방되었기 때문에 모든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가치가 있습니다(1베드 1,18-19 참조). 하느님께서 많이 사랑하신 것을 업신여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말해야 합니다. ‘생명을 경시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생명 뿐 아니라 나 자신의 생명도 경시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사람을 죽이지 마라”는 계명은 나 자신의 생명에게도 해당되는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경시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일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하느님의 업적입니다!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망치고 당신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각종 중독으로 인해 당신 자신을 망치지 마십시오!’ 이 세상의 속임수에 따라 생명을 측정하지 마십시오. 대신에 각자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자신과 이웃을 받아 들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사랑하시는 분(amante della vita)”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사랑하시는 분(Dio è amante della vita)”이라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우리 모두는 그분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드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바티칸 뉴스, 2018년 10월 10일, 번역 김호열 신부] 십계명에 관한 교리 : “사람을 죽이지 마라”는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살인의 첫 걸음입니다” “만일 사람을 죽이는 것이 누군가를 파괴하고, 억압하고,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살인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를) 보살피고, 가치 있게 여기고, 포용하고, 용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0월 17일 수요 일반알현을 통해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5,21-26)을 통해 “사람을 죽이지 마라”는 계명의 “더 깊은” 의미를 가르쳐주신 바를 설명하면서 이같이 강조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교리 교육은 ‘열 가지 말씀(Decalogo, 데칼로그, 십계명)’의 다섯 번째 말씀 곧,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인 “사람을 죽이지 마라”에 대해 계속 이어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번에) 이 계명이 하느님의 눈에는 인간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고, 거룩하고, 불가침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지를 강조했었습니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이나 자신의 삶을 멸시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으며 (하느님께로부터) 존재로 부르심 받은 조건이 무엇이든 간에 무한한 하느님 사랑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들은 복음(마태 5,21-26)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에 대한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조차도 살인의 한 형태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요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그치지 않으시고, 같은 논리로 모욕과 멸시 또한 (형제를) 죽일 수 있다고 덧붙이십니다. 우리는 (형제를) 모욕하는 것에 익숙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형제를) 모욕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숨쉬는 것처럼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형제를 모욕하는 것을) 멈추십시오. 왜냐하면 모욕은 (형제에게) 상처를 입히고 죽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멸시에 대해 살펴봅시다. “나는 (...) 이 사람들이나 이 형제를 멸시합니다.” 이는 인간 존엄성을 죽이는 하나의 형태입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이 우리 생각과 마음 안에 들어 가고, 우리 각자가 “나는 아무도 멸시하지 않을 것이야”라고 말한다면 좋은 것입니다. 이는 좋은 결심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보라, 네가 만일 멸시하고, 모욕하고, 미워한다면, 이는 곧 살인이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법도 이처럼 다른 행동들에 같은 판단을 부여함으로써 상이한 이 행동들을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우리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서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고,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치라고 일관되게 요구하십니다. 우리 또한 미사에 갈 때, 우리와 문제가 있는 사람들과 그러한 화해의 태도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들에 대해 나쁜 생각을 했거나 그들을 모욕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주, 미사가 시작하기 전에 사제를 기다리면서 잡담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험담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모욕과 멸시와 증오의 엄중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살인과 동일시하십니다. 다섯 번째 계명의 영역을 이 시점까지 확장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십니까? 인간은 고귀하고 민감한 삶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육체적인 존재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은 숨겨진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싶어하십니다. 사실, 한 어린이의 순수함을 해치기 위해서는 부적절한 말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한 여성에게 상처를 입히기 위해서는 차가운 행동 하나면 충분합니다. 한 젊은이의 마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신뢰를 부정하면 충분합니다. 한 남자를 파멸시키기 위해서는 그냥 그를 무시해버리면 충분합니다. 무관심은 (사람을) 죽게 합니다. 이는 곧, 다른 사람에게 “너는 나에게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죽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살인의 첫 걸음입니다. 살인하지 않는 것은 사랑의 첫 걸음입니다. 주님께서 카인에게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첫 번째 살인자인 카인의 입에서 나온 끔찍한 대답을 우리는 성경의 시작부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카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가톨릭 교회 교리서」, 2259항 참조) 살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나와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당신 일입니다” 등과 같은 대답입니다. 다음 질문에 대답해봅시다. “우리는 우리 형제들을 지키는 사람들입니까?” 네, 우리는 우리 형제들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지켜주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길이며, 살인하지 않는 길입니다. 인간의 삶에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진정한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대로, 자비입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용서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자비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용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살인이 누군가를 파괴하고, 억압하고,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살인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를) 보살피고, 가치 있게 여기고, 포용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용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누구도 “나는 나쁜 짓을 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없어”라고 생각하면서 착각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광물이나 식물은 이런 종류의 존재를 가지고 있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나 여자 모두에게 그 이상을 요구합니다. 끝까지 우리 자신이 되게 하는, 우리 각자가 행해야 하는, 우리 모두를 위해 준비된 선이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지 마라”는 계명은 사랑과 자비에 대한 호소이며,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부르심 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 모두 함께 이곳 성 베드로 광장에서 어느 성인의 말씀을 모두 함께 외쳤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이 아마도 우리를 도와 줄 것입니다. “악을 행하지 않은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우리는 항상 선을 행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이상을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취하시면서 우리 존재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피로 우리를 소중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생명의 영도자”(사도 3,15)이신 주님 덕분에 우리 각자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물입니다. 주님 안에서, 죽음보다 강한 그분 사랑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는 “사람을 죽이지 마라”는 말씀을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호소로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곧,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사랑으로의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바티칸 뉴스, 2018년 10월 17일, 번역 김호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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